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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 福泉洞 古墳群)

노촌魯村 2023. 11. 15. 10:11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 福泉洞 古墳群. 사적. 부산 동래구 복천동 일원)

부산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있는 가야 때 무덤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 땅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땅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복천동 무덤에서 보이는 새로운 무덤양식은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삼국 시대의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동래 중심가 북쪽에 반달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에 위치한다. 고분군이 조영되어 있는 구릉은 가장 높은 곳이 62.5m이고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완만하게 낮아진다.

1969년 주택 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8차례 이상의 계획 조사와 수차례에 걸친 수습 조사가 이루어졌다. 1969년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여러 종류의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부산 지역의 고대 문화 내용을 구명하는 것은 물론 가야와 신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학문적 기여를 하고 있다. 널무덤 3기, 부곽이 딸린 덧널무덤 19기, 단독 덧널무덤 58기, 부곽 딸린 구덩식 돌방무덤 6기, 단독의 구덩식 돌방무덤 42기, 독무덤 2기, 굴식 돌방무덤 1기 등 총 17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이 조사되었다.

1. 무덤의 분포 상태와 묘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유구가 구릉의 정상부에서 사면에 걸쳐 비교적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는 전형적인 분묘 유적이다. 무덤의 분포 상태를 보면, 구릉 능선을 따라 부곽을 가진 대형 무덤이 있고, 구릉의 주변 지역과 경사면에는 중·소형 무덤이 있다. 대체로 능선에 있는 무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축조되어 간 경향을 보이다가 8·9호분 이후 다시 구릉의 아래 부분으로 축조되고 구릉의 중복에 이르러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축조되면서 고분의 축조가 종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묘제는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 돌방무덤·독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 등이다. 이 중에서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방무덤은 규모에 따라 대형분과 소형분으로 나누어진다. 대형분은 주로 각기 독립된 주·부곽으로 이루어졌고, 소형분은 부곽이 없는 단독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립된 주·부곽으로 이루어진 대형분은 주·부곽 양자가 모두 목곽인 것과 주곽은 구덩식 석곽이고, 부곽은 목곽인 것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부곽이 딸리지 않는 단독 무덤도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방무덤으로 구분된다.

2. 중요 고분의 특징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성격과 삼국 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고분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복천동 38호분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최초로 주인공을 묻는 주곽과 주인공을 위해 여러 가지 물품을 넣는 딸린 부곽으로 구성된 덧널무덤이다. 앞 시기의 덧널무덤들은 부곽이 딸리지 않고 하나의 목곽 안에 주인공과 유물을 부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양동리 162호분, 대성동 29호분 등이다.

또한 영남 지역에서는 최초로 시상(尸床) 시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복천동 38호분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덧널무덤은 덧널 바닥에 고운 모래를 깔고 그 위에 시신과 부장품을 매장하였으나, 복천동 38호분은 순장자가 묻히는 공간을 제외한 전 바닥에 깬 돌을 깔았고 주인공이 놓일 부분과 그 이외의 부분을 단을 쌓아 구분하였다. 그리고 산사람을 무덤에 순사시키는 순장이 영남 지역의 고분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전 시기에는 가죽이나 나무 갑옷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복천동 38호분 시기부터 철제 갑옷과 비늘 갑옷, 투구 등 가장 빠른 시기의 방어구류들이 나왔다. 이외에 화살촉에서도 앞 시기의 뿌리가 없는 것과 뿌리와 자루가 달린 것들이 같이 나오고, 창에서도 고사리 장식이 달린 것과 짧은 것 등 오래된 요소와 새로운 요소가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복천동 38호분의 구조와 유물은 오래된 요소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의 특징이다.

복천동 38호분 주곽의 덧널 구조와 덧널 안의 시설물, 순장, 갑옷과 투구, 미늘들은 영남 지역의 덧널무덤의 변화를 연구할 때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 깔린 화살촉 열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유물 부장의 변화를 연구할 때에도 매우 중요한 유구이다.

3. 각 시기의 대표적인 고분

1) 복천동 38호분

구릉 남쪽 부분의 정상에 만들어진 부곽이 딸린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주곽은 길이 750㎝, 너비 350㎝, 깊이 150㎝ 이상의 긴 네모꼴의 묘광을 파고 그 안에 길이 535㎝, 너비 250㎝의 목곽을 만들었다. 목곽은 두께가 약 10㎝ 되는 판재 수십 매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긴 벽을 따라 너비가 25㎝ 되는 네모꼴의 기둥을 세워 목곽의 뚜껑과 벽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북쪽 모서리에 길이 160㎝, 너비 80㎝의 공간을 제외하고 전면에 크고 작은 깬 돌을 깔았다. 깬 돌이 놓인 가장자리 열이 매우 반듯하고 끝부분에서 안쪽으로 80㎝ 들어온 곳에 큰 돌을 2단으로 놓아 단을 만들었다. 단 가운데에는 편평한 돌을 놓아 그 위에 갈대 같은 것으로 엮은 멍석을 깔고, 그 위에 70㎝ 간격으로 화살촉을 5열 깔았다. 돌이 깔리지 않는 서북쪽의 모서리는 순장자가 매장된 공간이다. 목곽과 묘광 사이의 공간은 모래가 섞인 흙과 점토를 번갈아 가면서 채웠고, 목곽 위에는 점토와 모래, 부식토를 2~10㎝ 두께의 얇은 띠 모양으로 교대로 쌓아 올렸다. 목곽 안에는 400점 이상의 화살촉을 비롯하여 마구류, 쇠낫, 갑옷, 투구, 도끼, 낫, 고리 자루 칼, 손칼, 철사 등의 철기류와 화로 모양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주인공의 머리 위쪽에는 주로 화살촉과 투구, 옥으로 만든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2) 복천동 31호분·32호분

고분군에서 가장 높은 62m의 구릉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진 능선부에 능선부와 나란히 있는데, 주곽인 32호분이 아래쪽인 남쪽에 배치하고, 부곽인 31호분은 부곽의 뒤쪽인 북쪽에 배치하였다. 주곽은 길이 712㎝, 너비 449㎝, 깊이 265㎝ 크기의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길이 500㎝, 너비 150㎝, 높이 150㎝ 크기의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 바닥에는 작은 깬 돌을 한 벌 깔아 주검과 유물의 받침대로 사용하였는데, 그 크기는 길이 490㎝, 너비 140㎝로 목곽 안쪽 전면에 깔았다. 목곽이 설치된 부분에는 나무가 썩으면서 변한 회색 점토의 너비가 10㎝ 정도인데, 이 너비는 목곽에 사용한 목재 두께로 추정된다. 구덩이와 덧널 사이의 너비 106㎝ 공간에는 흙과 작게 깬 돌을 채워 넣었다. 목곽의 윗면과 구덩이의 윗면 간의 깊이는 115㎝이다. 구덩이 벽 쪽에는 점성이 강한 황갈색 점토와 적갈색 점토를 띠 모양으로 겹겹이 쌓았고, 목곽 가까이에는 작은 깬 돌을 채워 넣었다. 목곽 안에는 주검과 유물을 넣었는데, 주검은 부곽이 있는 남쪽에 두었고, 머리 방향이 남쪽이다. 유물은 주검의 발치 아래에 넣었는데, 대부분 토기이다.

부곽은 주곽의 북쪽 구덩이 벽으로부터 80㎝ 떨어져 주곽과 일렬로 배치하였다. 구덩이는 길이 600㎝, 너비 320㎝, 깊이 240㎝인데, 주곽보다 너비가 좁고, 바닥은 주곽 바닥보다 25㎝ 위에 만들었다. 구덩이 안에는 길이 470㎝, 너비 170㎝ 크기의 목곽을 설치하고, 목곽 안에 유물을 넣었다. 부곽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생땅 그대로이다. 목곽 내부의 남쪽에는 여러 점의 큰 항아리와 둥근 바닥 항아리를 넣었고, 약간의 공간을 두었으며, 그 반대쪽인 북쪽에는 크기가 작은 토기들을 넣었다. 목곽과 구덩이 벽 사이의 공간에는 점성이 강한 적갈색 점토와 황갈색 점토를 번갈아 가면서 띠 모양으로 쌓았다.

31호분·32호분은 구릉 능선부 중앙에 위치하고, 주곽과 부곽을 합한 길이가 1,392㎝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중에서 큰 무덤에 속하고, 많은 양의 유물이 나와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이 고분군을 만든 집단의 지배층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충전 공간의 충전재가 흙과 돌로 되었고, 덧널이 썩으면서 덧널 뒤쪽에 채워 넣은 돌이 흘러내려 마치 그 모습이 경주의 돌무지 덧널무덤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변형된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이해하여 31호분·32호분이 만들어지던 시기부터 부산 지역이 신라의 영향 아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돌과 흙을 채워 넣은 구조는 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나타나는 형식이고, 덧널무덤이 쇠퇴하는 시기에 해당하며, 경주 돌무지 덧널무덤과의 관계는 적다. 껴묻거리 중에는 경주에서 만든 토기가 일부 있어 이 시기부터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이 무덤은 가장 늦은 형식의 덧널무덤이고, 출토된 유물은 5세기 초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3) 복천동 1호분

구릉 정상부에서 서남쪽으로 70m가량 떨어진 경사면에 위치한다. 이 고분은 1969년 9월 주택 공사 중에 발견되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같은 해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긴급 조사를 하였는데, 복천동 1호분의 발굴이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세상에 알려지는 단서가 되었다. 이후 고분군이 있는 구릉 일대는 지역의 고고학계에서 예의 주시하여 각종 공사로 인해 파괴되는 무덤에 대한 수습 조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복천동 1호분은 조사 당시 봉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다른 무덤 조사에서도 표면에 드러난 봉분은 확인되지 않아 다른 무덤들처럼 무덤을 만들 당초부터 지표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봉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지면을 凵자 형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구덩식 석곽을 만들었다. 석곽은 주축 방향이 등고선 방향과 나란하다. 석곽은 깬 화강암을 사용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쌓았는데, 북서쪽 장벽 일부는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벽면은 깬 돌을 10~11단 정도 가로 또는 세로 방향으로 쌓고, 돌 틈새는 진흙을 발랐다. 석곽은 길이 830㎝, 너비 130~140㎝, 깊이 130㎝이고,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이다. 벽면 위에는 석곽의 방향을 가로질러 길이 180~200㎝, 너비 70~130㎝, 두께 20~30㎝의 크고 편평한 뚜껑돌 8매를 덮었다. 뚜껑돌의 틈새는 작은 돌을 채워 넣었고, 그 위에 60㎝ 두께로 검은색 점토를 덮었다. 당시의 지표면에서 뚜껑돌까지의 깊이는 140㎝로서 석곽이 완전히 지하에 마련된 지하식이다.

바닥 전면에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사람 주먹 크기만한 냇돌을 한 벌 깔았다. 동북쪽 단벽과 서남쪽 단벽 가까이에 토기류를 넣고, 금속기류는 남동쪽과 북서쪽 장벽을 따라서 넣었다. 서남쪽 단벽에서 90㎝ 안쪽에 금동관이 놓여 있고, 금동관 동쪽에 귀걸이와 목걸이로 추정되는 구슬이 나왔는데, 금동관과 귀걸이·목걸이 등이 나온 위치로 볼 때,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서남쪽임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의 왼쪽 허리께에는 칼 끝이 동북쪽으로 놓인 장검이 있고, 장검으로부터 서쪽으로 80㎝ 떨어진 곳에서는 마구류가 나왔다. 창·도끼·미늘쇠 등의 무기류는 남동쪽 장벽을 따라서 나왔는데, 무기류 아래에는 10매씩 1단위로 된 덩이쇠 100매가 나왔다.

복천동 1호분은 11호분과 더불어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금동관이 나온 무덤으로서 주목받아 왔는데,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에 해당되어 신라의 위세품 체제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온 토기도 대부분이 신라 토기이다. 그 중에는 다리가 짧은 뚜껑 굽다리 접시도 나왔는데, 뚜껑 손잡이 끝이 말려든 형태이다. 이 무덤에서 나온 금동관은 5세기 전반이나 중엽으로 보거나 또는 신라 양식 금동관에 주목하여 기존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성격과 다소 다른 신라 중앙과의 관계가 강화된 새로운 계보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덩이쇠의 형식과 다리가 짧은 뚜껑 굽다리 접시 등이 있어 무덤을 만든 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금까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9,800여 점 이상이다. 토기류가 2,500여 점, 철기류를 포함한 금속기류가 3,200여 점, 유리제 구슬을 포함한 장신구류가 4,010여 점, 골각제 등의 기타 유물이 10여 점, 그 외 사람 뼈 5구, 말 이빨 7점 등이 있다. 경주 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 유물은 많지 않은 대신 철제 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가운데서도 무구류와 갑주류가 특히 많아 주목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경주의 대형 고총 고분을 제외하고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 도항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더불어 남부 지방 최대의 고분군이다. 그리고 유물은 경주의 대형 적석 덧널무덤 다음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묘제의 변화가 가야 지역의 어느 고분군보다도 뚜렷하기 때문에 낙동강 유역 무덤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할 때 하나의 표지적인 유적이다. 또 구릉의 능선부를 따라 대형 무덤, 구릉 사면에는 중·소형 무덤이 배치되었는데, 이와 같은 무덤의 배치는 당시 사회 구성 관계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 출토된 2세기 초부터 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유물의 변화와 편년은 가야 및 신라 지역 고분의 부장품 구성의 변화 모습을 구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1981년 6월 9일 사적 제27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로 재지정되었다.(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산역사문화대전 동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