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서인의 중심인물이자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던 남구만의 초상이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 조선시대 신하가 착용했던 신발인 화를 신고 있다.
남구만(南九萬. 1630 인조7년∼1711 숙종 37년)
조선 후기의 문관이자,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이다.
결성현(現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에 살았으며,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5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1657년) 정언이 되었다. 1660년 이조 정랑,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치고, 1668년 안변 부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674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4년간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중앙으로 돌아가자 지역민들이 생사당(살아있는 이를 위한 사당)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1679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나, 남인의 윤휴와 허적을 탄핵해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게 되자 도승지가 되었고, 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남구만 역시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1701년 희빈 장씨의 중형(重刑)을 주장하는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하자 충청도 아산현[4]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낙향했다. 사후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그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영조 시절에 《천의소감》이란 책에서 그와 유상운을 매도하는 글귀가 실려서 영조가 "이 책을 당론을 위해 썼느냐?"라고 격노하여 다시는 당론을 입게 담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신하들에게 받아낸 일이 있었다.(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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