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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사천왕사지

노촌魯村 2006. 2. 12. 16:16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낭산(狼山) 기슭 신문왕릉의 옆, 선덕여왕릉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의 절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천왕사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 속성과 신라인들의 불교관 및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 절터는 본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여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미리 알고 있던 3가지 일 중 하나로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가를 묻자 이곳을 지목하였는데 여왕이 죽은 뒤 30년 뒤에 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짐으로써 여왕의 예지능력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낭산을 수미산(須彌山)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74년(문무왕 14년) 당나라는 신라가 계림도독부의 군사를 공경한다는 핑계로 50만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의 침입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명랑법사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문두루비법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침입이 급박하여 절을 완공할 시간이 없어 색이 있는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빙신상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명승들에게 비법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뒤 정식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여 5년만에 완공하여 사천왕사라 이름하고 성전(成典)을 두어 관리하였다.가람은 금당지의 앞에 동서로 목탑을 세웠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를 두었다. 금당지는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초석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지의 중간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남아 있다. 동탑지는 130㎝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탑지의 중앙에는 118㎝ 내외 크기의 심초석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이 있다. 서탑지는 동탑지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탑지의 앞에 중문, 금당지의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고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터가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비신, 높이 2.4m인 1기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절의 동편에 남아 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음각 등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뛰어난 것이다. 탑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천왕상이 부조된 전은 일부가 복원되었는데 녹유전이다. 복원한 바에 의하면 천왕들은 각기 2마리씩의 악귀를 깔고 앉은 생령좌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동방지국천왕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장도를 들고 있으며 남방증장천왕으로 추정되는 천왕상은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다. 이 사천왕상에 대해서 선덕여왕대에 활약하였던 승려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만들었다는 팔부중상이라는 견해도 있다.이 절에는 경덕왕대에 도솔가, 산화가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사가 있었다.(문화재청)

 

 

사천왕사 목탑(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사천왕사지는 낭산 남쪽에 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토벌하려 함에 당시 당에 가 있던 의상대사가 문무왕 15년(675)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명랑법사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병사를 물리치게 하였다는 절이다. 현재 이곳에는 당간지주, 금당지, 동서목탑지, 좌우 경루, 석조 귀부 등이 남아 있다. 동.서탑지에는 높이 약 130cm의 토단을 형성하고, 그 중앙에 118cm 너비의 심초석이 있는데, 그 중앙에 2단 턱의 방형공이 파여 있다. 상부의 홈은 찰주공 혹은 사리공의 개석이고, 아래 홈은 사리공으로 짐작되고 있다. 심초석 주변에 남아 있는 초석의 배치로 보면 목탑은 전면과 측면이 각 3칸이고, 1변의 길이가 약 650cm 였음을 짐작케 한다. 금당 앞에 1기의 탑을 세우는 삼국시대의 양식에서, 통일기에 들어오면 동서로 쌍탑을 세우는 양식으로 변모하는데, 사천왕사가 그 최초의 사찰이라 보고 있다.(慶州市史3)

심초석

목탑지의 주춧돌

 

 사천왕상(국립경주박물관)

당간지주

  

사천왕사지의 귀부

 

문무왕의 비편(사천왕사지 부근에서 발견)

현황 : 679년 칠처가람의 하나로 신유림에 창건되어 쌍탑가람식가람배치의 시원을 이룬 절터이다. 금당지 전면에 동.서목탑지가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좌우경루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정연하게 남아 있다. 낭산 자락에 이어진 강당지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동해남부선 철로가 관통하고 있다. 절터의 서남족 국도 7호 도로변에 당간지주가 있으며, 그 동쪽으로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가 2구 있다.(慶州市史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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