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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망덕사지

노촌魯村 2006. 2. 12. 16:21

 망덕사지

사적 : 제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56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기록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4)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리의 외침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를 짓고 당나라에 거짓으로 당나라 고종을 위한 절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 예부시랑 악붕구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신라 조정이 당의 사신을 망덕사에 인도하자, 그들은 문 앞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의 절이라 하여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망덕사지는 국립박물관에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13층목탑터와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익랑터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남쪽에는 계단터. 서남쪽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망덕사 목탑(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망덕사는 신문왕 4년(684)에 완공된 절이다. 절터의 남쪽에는 높은 계단이 있고, 거기에 중문터가 있으며, 중문을 들어서면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금당, 강당, 회랑터가 있다. 망덕사 목탑은 쌍탑으로 동.서 약 34m 간격을 두고 자리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4년(755)에 망덕사 13층목탑이 진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탑지의 토단 위에 초석과 심초석이 남아 있으며, 1930년경 이 절터에서 석조상륜이 발견되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주시사3)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69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당간이란 고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기를 달았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시설한 깃대받침을 말한다. 이 당간지주는 원래의 모습으로 65cm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안쪽의 위쪽에 장방형의 구멍을 만들어 깃대를 세운 상태로 고정시키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각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으나 소박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망덕사가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세웠던 사찰이므로 당간지주 역시 같은 연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시대가 뚜렷한 통일 신라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당시의 당간지주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높이는 2.5m이다.(문화재안내문에서)

 

망덕사 스님 선율에 관한 이야기

망덕사 승려 선율은 『육백반야경』을 펴내고자 했다. 그러나 끝마치기 전에 저승사자에게 잡혀갔다.
“빈도는 만년에 『대품반야경』을 만들려 하다가 도중에 명이 다하여 왔습니다.”
“네 수명은 이미 다했지만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을 이루도록 하라.”
북두칠성의 명을 집행하는 염라대왕은 선율을 살려 보낸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는 여자 하나를 만난다.
“저도 남염주의 신라사람이오. 부모가 금강사의 논을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저승에 잡혀와서 고통을 받고 있소. 우리 부모에게 논을 돌려 주라고 일러 주시고 어디어디에 가면 살아생전에 제가 감춰 두었던 참기름 한 병과 고운 베가 있으니 그것으로 불등에 불을 밝히고 불사에 사용하십시오. 하오면 제 고뇌가 소멸될까 하오.”
선율이 돌아와 경주 남산에 이르러 여자의 당부대로 하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서로 도와 『반야경』을 완성시켰다. 그 책은 경주 승사서고에 보관돼 있다.

 

장사(長沙)와 양지버든

  지금 산림환경연구소 앞에서 남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몇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 언덕이 있다. 그 곳이 망덕사(望德寺)터다. 망덕사 부근 일대를 양지(兩肢)버든이라 하고 망덕사와 산림환경연구소 사이 모래벌을 장사(長沙)라 불러온다. 신라가 국제적으로 나라 구실을 한 것은 제17대 내물왕 때부터 였다. 그 당시 신라는 어느 나라 보다 힘이 약했으므로 왕의 셋째 왕자는 인질로 일본으로 가 있었고 둘째 왕자는 고구려로 인질로 가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세월이 흘러 제19대 눌지왕이 즉위하니 인질로 끌러 간 왕자들의 친형이었다. 두 아우를 생각하고 슬퍼하는 임금을 위해 충신 박제상(朴堤上)은 고구려에 들어가서 임금의 첫째 아우인 보해를 구해 온 다음 다시 둘째 아우인 미사흔을 구해 내기 위해 집에도 들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은 말을 달려 뒤를 따라 갔으나 박제상은 벌써 율포(栗浦. 지금의 울산)에서 배를 탄 뒤였다. 부인은 목을 메어 남편을 불렸으나 남편은 떠나가는 배 위에서 손만 흔들었다. 슬픔을 안고 돌아오는 박제상의 부인은 이곳에서 와서 남편을 떠나 보낸 설움에 복받쳐 걷지도 못하고 이 모래벌에 드러누워 길게 탄식을 하였으니 그 후부터 이 곳을 장사(長沙)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친척들이 달려와서 부인을 부축하여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부인이 두 다리가 뻗어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이 곳을 양지(兩肢)버든이라고 부르고 있다. 박제상은 미사흔 왕자를 구해 고국으로 보내고 그 곳에서 화형을 당하여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었으니 그 부인은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남편이 숨져 있는 그 땅이라도 보고자 발돋움하고 동해를 바라보다가 끝내는 동해를 향한 채 바위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에서 그 바위를 망부석(望夫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황 : 사천왕사지 남쪽 국도7호 도로 건너편에 있는 절터로 금당지, 동서목탑지,당간지주 등이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금당지와 회랑 등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면서 훼손이 되어 있으며, 동탑지는 약 1.2m 높이의 토단 위에 초석이 십여 개 남아 있으나 서탑지는 약 1m 토단에 2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사지는 사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간지주는 보물 제69호로 지정 되어 있다(경주시사3)

신화와 설화로 만나는 문화재 여행(유형 문화재 중심)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5.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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