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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분황사 및 분황사 동편 구황동의 원지

노촌魯村 2006. 2. 12. 16:13

  634년(신라 선덕여왕 3) 용궁(龍宮)의 북쪽인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 터라고 전해지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창건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 당(幢),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했다.
그 뒤 원효(元曉; 617-686)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와 <금광명경소>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의 교학을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법성종(法性宗; 일명 원효종, 분황종, 해동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했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일연(一然; 1206-1289)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 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구황동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양 기둥 사이에 거북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 

 

분황사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문화재청)

 

 

 

 

 

 

 

 

 

 

분황사 모전석탑의 기단의 그랭이 기법

 

 

보광전

 

분황사 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이 불상은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있다. 불상은 1998년 보광전 중수공사 때 발견된 ‘분황사중창문’과 ‘분황사중건상량문’에 ‘만력기유(萬曆己酉 1609)에 “범행거사 신희인이 노력하여 구리 5,360근으로 약사상을 거듭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약사상의 왼손에 들고 있는 약그릇에는 ’건륭(乾隆) 39년(1774) 을미 4월 25일 조성‘이라고 쓰여 있다. 크지 않은 육계와 나발을 갖춘 얼굴은 풍만하게 조성되었다. 가사는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두꺼운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려 아랬단에서 U자 모양의 층단을 이루고 무릎에서 접혀지고 있다. 가사 사이로는 바지의 윘단이 띠 위로 주름져 있다. 왼손은 앞으로 뻗어 손바닥에 약그릇을 들었고, 오른손은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셋째 손가락만 약간 굽혔다. 광배는 조성되지 않았고, 대좌는 아무 조각이 없는 판석을 사용하였다. 다만 앞에 불단으로 사용된 돌은 통일신라시대의 탑 몸돌로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慶州市史3)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 대좌

화쟁국사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이를 확인했다.

삼룡변어정

석정에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뢰면서 남편을 찾아 줄 것을 호소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 우물에 놓아 주고 다시 살게 했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분황사 출토 석사자(경주박물관)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유뮬

 유물함(국립경주박물관)

 

 

 정원의 스님상

분황사의 석불

 

 

분황사 동편 구황동의 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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