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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성

비봉산 대곡사

노촌魯村 2006. 2. 13. 13:48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왕사인 지공국사와 나옹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산내에는 본원을 비롯 구암을 지어 불교를 숭상하게 하여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고려시대의 대찰이다. 경내에는 대곡사 대웅전 (지방 유형문화재 160호), 대곡사 다층석탑 (지방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 명부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39호), 대곡사 범종각 (지방 유형 문화재 161호)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의성군청) 

 

범종각

 

 

 

대곡사 현판

 대곡사는 인도승 지공이 원나라와 고려를 다니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이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라는 이름을 붙여 지었다.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대부분이 무너져 선조 38년(1605)에 탄우대사가 다시 세웠다. 그 후 숙종 13년(1687)에 태전선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세우면서 이곳 태행봉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백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해서 대곡사로 이름 바꾸었다.

불전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내부의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석가여래삼존불상과 함께 미륵불을 그린 후불탱화와 여승을 그린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대곡사 대웅전은 구조나 양식적인 면이 건실한 편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의성군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17일에 대곡사에 들어가다" 라는 시(詩)가 대곡사 범종각에 걸려있다.

    石路高低平不平

 돌 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통하니

閑騎果下彈鞭行

 한가한 손이 과하마(果下馬)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輕風靜掃煙光去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落月時兼曉色明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 빛을 겸하여 밝다.

短麓前頭看寺榜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寺]의 현판을 보고,

橫舟側畔問灘名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灘] 이름을 묻는다.

孤村何處吹寒笛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抱疾他鄕易惱情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이규보(李奎報) : 고려의 대표적인 문신, 문장가 중의 한명으로 의종 22년(1168)에 황려현(여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어 14살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과거에 수차례 떨어진 이후 비슷한 처지의 문인인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26세 되던 해(명종 23년)에 『동명왕편』을 완성하였고, 1199년 입사하여 벼슬이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고,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였다. 저서에는 동명성왕의 업적과 고려건국을 노래한 『동명왕편』, 『백운소설』 등이 있다.

 

 

대웅전

대웅전과 다층석탑

 대웅전 공포

 

대웅전 내의 불상

대웅전 내부의 나한상

내웅전 내부의 나한상

나한전

 

 

 나한전 내부

 대곡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으로, 탑몸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이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절을 지었으며 처음에는 대국사라 이름하였다가 다시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173㎝로서,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다. 땅에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몸돌은 없고 지붕돌옥개석만 쌓여 있는 상태이다. 각층의 지붕돌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층과 7층은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 들어 그 사이 한층의 지붕돌이 없어진 것 같아 원래는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대곡사 다층석탑은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보다는 조금 늦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적어도 그 시기가 11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층의 몸돌이 남아 있지 않고 지붕돌도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12층까지의 지붕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 초기의 청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 준다.(의성군청) 

 

기단부

 

명부전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웅선사에 의해 창건 되었으나 임진왜란시 화재로 소실되어 조선 선조 38년(1602)에 탄우대사가 중창하였고 숙종 13년(1687)에 중건하였다. 대곡사 명부전은 건립 당시부터 명부전으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창호구성 수법 치목방법 등 건축 수법에서 17~8세기의 형식들을 유치하고 있다. (의성군청)

명부전 내부

 

 

 명부전 시왕

 명부전 시왕

 

 

 

 

 

 

대곡사 석장승

 대곡사 석장승

 

 

 

 

 

산신각

산신각 내부

 

대곡사의 화전놀이

봄이 오면 이곳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삼월삼짇날 하루를 즐기려고 비봉산을 찾아 화전놀이를 벌인다. 이 모임은 누가 주관하는 것도 아니지만 주민들이 자동적으로 모여 논다고 한다. 비봉산 동쪽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60호인 대웅전과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인 범종각 등이 있는 대곡사가 있는데, 이곳에 자생하는 진달래로 봄이면 온 산을 붉게 물들여 화전놀이엔 안성맞춤이다. 이 놀이에는 의성군, 안동시, 상주시, 예천군, 선산군 등 5개시군 13개 면의 주민이 참가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특히 해방전후엔 수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화전놀이가 하루뿐인 탓에 아침부터 사방에서 모여드는 인파로 비봉산 꼭대기부터 대곡사까지 행렬을 이루어 그야말로 자연의 꽃, 사람의 꽃이 일대 장관이었다고 한다. 놀이 방법은 진달래를 따서 머리나 옷에 꽂고 멋을 부리며 꽃방망이를 가지고 삼삼오오 짝이 되어 노는 것이다. 한편, 시집 간 젊은 아낙네들은 친구끼리 대면의 기회도 되는 날이기에 “재화 재화 재화화 얼씨고 절씨고 좋을씨고 춘삼월 화전놀이 간다. 어라 두둥실 거들거리고 나간다”는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더욱 낭만적인 것은 화전(花煎, 꽃전)이다. 바로 진달래 꽃잎을 쌀가루에 반죽하고 참기름을 발라 지져 먹는 두견화전(杜鵑花煎)인데, 봄의 미각을 살리기엔 가히 으뜸이다. 삼동 추위에 갇혔던 우울한 기분을 삼월삼짇날 하루에 활짝 열어 제치고 화전을 먹으며 새해 새 농사에 새 출발하는 놀이로 전해지는 이 놀이는 근년에는 기백 기천명이 모여 면면히 그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경상북도:전설과 함께하는 경북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