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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군위

인각사(1)

노촌魯村 2006. 7. 10. 09:36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 10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건(重建)하고 토지를 하사하여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하안지지(下安之地)로 정하였다.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불교서적 100여권을 저술하였고,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었다.

조선 숙종때 다시 중수(重修)하고 숙종25년에 당시 의흥현감 박성한에 의하여 증축되었다.

경내에는 중국 왕희지의 유필로 집자한 보각국사 탑 및 비가 보물로, 사찰주변은 사적지 제374호로 지정되었고, 석불상과 부도가 있다

이 곳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해발 828m의 장엄하고 준수한 태산준령의 화산(華山)에서 서서히 완만한 능선을 이루며, 비단같이 깔리면서 위천 상류를 흐르는 개울가에 이르러 끝을 맺고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마을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인각마을의 내력은 기린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며,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이 마치 기린의 형상을 닮았으며, 인각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구전되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일연선사를 영정을 모신 국사전

일연선사 영정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

  고려후기의 고승. 성은 김씨. 처음의 법명은 견명(見明). 처음 자는 회연(晦然), 자호는 목암(睦庵).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출신. 김언정(金彦鼎)의 아들이다.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光州) 지방인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36년 10월 몽고의 침입이 일어나 병화가 전주 고부(古阜)지방까지 이르자, 병화를 피하고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면서 감응을 빌었다. 문득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있다가, 명년 여름에 다시 이 산의 묘문암(妙門庵)에 거처하라."고 하였다. 이에 곧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항상 "생계(生界), 즉 본질적인 세계는 늘지 아니한다(生界不滅 佛界不增)."는 구절을 참구(參究)하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오늘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포산․남해․윤산 등지에서 전란을 피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다.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머무르면서 설법,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물 흐르는듯한 강론과 설법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1277년(충렬왕 3)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에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2년 가을 충렬왕의 간곡한 부름으로 대전에 들어가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면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庶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이해 4월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 衣禮 : 옷의 뒷자락을 걷어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봉양이 마음에 걸려 몇 차례에 걸친 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아래에서 모시고 봉양하던 어머니가 1284년에 죽자, 조정에서는 군위 화산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1289년 6월에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게 올릴 글을 쓰고, 8일 새벽 선상(禪床)에 앉아 제자들과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거처하던 방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화록(話錄)>2권, <게송잡저(偈頌雜著)>3권, <조파도(祖派圖)>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 <제승법수(諸乘法數)>7권, <조정사원(祖庭事苑)>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불교인물사상사>(불교신문사편. 1990).

 

옛 사진(일제시대)

 

 

 

일연선사 부도(보각국사정조지탑)

이 탑과 비는 고려 충렬왕15년(1289)에 입적(入寂)한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부도탑과 그 탑의 비문이다.

보각국사 일연 스님이 노년(老年)에 인각사에서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고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보각국사비와 정조지탑이 세워졌다.

탑의 상층은 불상, 중층은 연화(蓮花), 하층은 토끼·사자·원숭이등 여러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승려 일연스님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팔각의 탑의 중심부에 "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는 탑명과 사천왕입상과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 이 탑이 인각사 동쪽 2km 떨어진 부도 골에 있었으나 외지 사람들이 자기 조상의 묘를 안장하기 위해 1928년 서편으로 50m쯤 옮겨 놓은 것을 1978년에 인각사 경내(境內)로 다시 옮겼다.

비는 충렬왕 21년(1295) 국사(國師)의 불제자(佛弟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다.

높이 6자, 폭 3자반, 두께 5인치인 탑신(塔身)의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으며, 지금은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 알 수 있다

명저의 산실을 찾아서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10.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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