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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해저터널

노촌魯村 2007. 1. 2. 18:40

 

해저터널

충무교를 잇는 양쪽의 교각 옆으로 슬레이트 지붕의 해저터널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1927년 일제에 의해 착공돼 5년 만에 건설된 동양 최초의 바다 밑 도로다. ‘용문달양’(龍門達陽). ‘용궁의 문으로 들어가면 빛 고을 산양(山陽)에 이른다’는 내용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시공 당시 통영군수였던 야마구치 아키라의 필적이라고 한다. 길이 483m,폭 5m,높이 3.5m의 터널 안으로 들어서니 아닌게 아니라 마치 용의 목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양쪽 벽에는 ㄷ자형의 기둥이 3m 간격으로 등골처럼 드리워져 음습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6m마다 설치된 조명등이 그나마 안도의 빛으로 다가온다.  1592년 7월 왜군은 거제와 통영을 거점으로 삼아 해상을 장악하려는 작전에 돌입한다. 이에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은 한산도 견내량으로 왜군을 몰아넣어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물리친다. 패한 왜군들은 지금의 해저터널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나아가는 이곳은 밀물 때면 바다가 되고 썰물 때는 육지가 되는 요새. 마침 썰물이었다. 왜군들은 급한 나머지 땅을 파느라 혈안이었으나 결국에는 전멸했다. 일제강점기의 야마구치 통영군수는 이를 기리기 위해 해저터널 공사에 착수했다. 장렬하게 전사한 일본군의 영령 위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해저터널 공사는 양쪽 바닷물을 막는 물막이 공사를 먼저 하고 노출된 해저면을 다지는 바닥굴착 공사로 이어졌다. 그 다음 철근콘크리트로 터널을 만들고 토사로 되메우기를 한 결과 터널과 운하가 동시에 생겨났다. 당시 기술로는 쉽지않은 대역사였다. 1932년 11월 20일 개통과 함께 ‘통영 태합굴(太閤堀) 해저도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합(太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칭. 그러나 통영 사람들은 왜군들이 스스로 무덤을 판 곳이라 해서 ‘판데굴’ ‘착량굴’ 등으로 부르다 해방 이후에는 ‘해저터널’이라 명명했다. 개통 이후 해저터널의 하루 통행량은 5000여명, 연간 180여만명. 우마차는 물론이고 자전거와 차량까지 이곳을 지나다녔다. 그러나 40년 세월에 시설이 노후되면서 천장에서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해저터널 위로 충무교를 가설한 뒤 차량 통행은 금지하고 보행자 통행만 가능토록 했다. 이후 미륵도의 상수공급을 목적으로 바닥 양쪽에 폭 1m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터널의 폭은 당초 7m에서 5m로 축소되고 말았다. 해저터널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철근콘크리트조의 터널 본체는 물론이고 양측 출입구 부분의 목조트러스 덮개부분도 건설 당시에 버금가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해저터널의 중간쯤에 이르면 건축공사 당시의 사진이 아크릴판에 전시돼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끈다.(통영시청 자료) 

 

 

 통영대교 야경

충무대교 야경

통영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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