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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칠곡

신유장군 유적지

노촌魯村 2007. 4. 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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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1982. 8. 4)로 지정된 곳으로 조선 효종때의 무장(武將) 신유(1619∼1680)장군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장군의 자는 경숙, 호는 봉하, 본관은 평산으로 광해군11년(1619)에 약목면 복성리 증호조참판 신우덕의 4남으로 출생하여 인조23년(1645)인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등 여러 무직(武職)을 거쳐 효종7년(1656) 12월 함경북도 혜산첨사로 부임 후 병마우후(兵馬虞後)로 있을 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효종9년(1658)원군을 이끌고 만주에 원정하여 흑룡강부근에서 그곳을 침입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전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 하며 장군은 이 원정의 전말을 북정일기(北征日記)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는데 4개월 21일간의 전투기록을 담은 이 일기는 17세기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의 최초의 접촉에 대한 현지 사령관의 기록이란 점에서 세계적인 사료로 인정되고 있다. 장군은 숙종6년(1680) 향년 62세로 생을 마감하니 왕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왕의 사제문에는 장군의 흑룡강 출병과 승전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처음에 교리 이동적이 전각하고 전의인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시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에 고쳐 세운 비석은 경산인 이상건이 썼다. 묘소는 숭무사 뒷산인 봉명산 중턱에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향사(享祀)를 3월에는 후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사당과 경역은 1979∼1981년에 보수, 정화하였다. 외삼문인 북정문(北征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신도비각과 존성제 건물이 나오고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을 지나면 신유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다.(칠곡군청)  

 

 

 북정문 

 북정문 현판

 신도비 :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처음에 교리 이동적이 전각하고 전의인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시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신도비 :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처음에 교리 이동적이 전각하고 전의인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시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에 고쳐 세운 비석은 경산인 이상건이 썼다. 

 

존성재 

 선위문 

 선위문 현판

 숭무사 

 

 숭무사 현판

신유장군의 숭무사 담장 옆에 있는 신한 기적비 

문신. 자는 경상, 호는 사오, 증참판 우덕의 아들. 장현광의 문인으로 일찍이 문예가 성취하였다. 1635년(인조 13)에 진사가 되고, 1646년(인조 24)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보직되었다. 이어 전적 예조좌랑, 청주판관, 합천군수, 고성현령, 형조좌랑, 성균관사예를 거쳐, 1672년(현종 13)에 정평부사에 이르렀다. 공은 만년에 향리로 돌아와 강낭을 심고, 채소를 가꾸는 일로 낙을 삼았으니 그 거실을 사오당이라 이름하였다. 판결사 장우일이 지은 묘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