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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신륵사

노촌魯村 2007. 4. 17. 09:44

 

 

신륵사 일주문

 봉미산 신륵사

 

 

 조포나루 비

신륵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 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출처 :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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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루

      

 범종각 

  

 극락보전

 

신륵사 극락보전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극락보전 내부 아미타불

보물 1791호(2012.12.27)미타여래삼존상(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은 조성자와 조성 시기(1610년)가 분명하다. 인일(仁日)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된다.

극락보전의 연봉이 조각된 공포 

  

  

 

 조사당

 조사당 내부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 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보물 제 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신륵사)

신륵사 조사전 옛 사진(일제시대. 조선고적도보)

 명부전

 명부전 내부

명부전 시왕

 

  

 

 

 

 

 

 

 

 

 보제존자 석종부도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신륵사)

 석등의 비천상

 석등비천상

  석등비천상

  석등비천상

 

 

 

 

 석등의 하부

 보제존자 석종 석비 석등 

보제존자 석종 석등 (1965년도 모습)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제존자 석비 기단부

석조문화재를 찾아서(부도 여행.통신라 고려시대 국가지정) 바로가기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신륵사 경내 서쪽 언덕에 주인을 알지 못하는 석조부도가 2기가 있다. 원래 조사당 뒷쪽 북족의 구릉 너머에 있었다. 1966년에 현 위치로 옮기는 도중 한 부도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부도 가운데 둥근 탑신의 부도는 근세의 작으로 보인다. 사리함이 발견된 부도의 기본형은 신라 이래로 내려오는 8각원당의 형태를 그대로 남기고 있다. 탑정부는 보주가 있다. 이를 보륜이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복발을 나태내고 있다. 상륜부를 받치고 있는 옥개석 역시 8각으로서 마루 끝에는 귀꽃을 나태냈다. 기왓골 같은 세밀한 조각 수법은 보이지 않고 다소 투박하다. 그 아래 역시 8각의 탑신이 놓이고, 이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대석은 8변의 앙련으로 나타냈고 그 아래 중대석은 짧은 원통형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돌로 구성되었으나. 8변의 중련복변으로 나타났다.(한국의 사찰 신륵사 중에서)

  

 

 

 

 

 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신륵사)

 

 

 

 

 

 

 

 칠성각

 

 사적비

 

 신륵사 다층전탑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신륵사)

 

 다층전탑의 벽돌의 연화문

 

 

 

 

 대장각기비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의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다(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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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헌과 강변 삼층석탑

 

 강변의 삼층석탑

기단석도 완전히 약화돼 넓적한 1석의 판석 위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문을 나타낸 갑석을 놓아다. 갑석 위에 옥신과 옥개석을 놓았다. 옥신석은 2층까지 남았고, 옥개석은 3층까지 있으나 3층 옥신석이 없어 상부에는 옥개석을 서로 포개놓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승 나옹스님의 다비처에 건립한 탑이라 한다.

  

 

 

 여강

 

 

 한국의 전탑여행 바로가기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나옹설화 바로가기 :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na-oho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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