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성당에 이상화 고택 가는 옛 골목 길
<이상화 연보>
1901 : (음)4/5 대구시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부 이시우(李時雨)의 차남으로 출생.
1907~1918 : 8세 때 부친 작고, 이후 백부 이일우의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공부함.
1915~1918 : 경성중앙학교(현 중동) 입학, 수료함.
1919 : 3.1운동 당시 백기만 등과 함께 계성학교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의 선전문을 작성하여 등사하는 등의 시위행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요인물이 검거되자, 상화는 서울로 피신. 이해 10월 백부의 권유로 서온순과 결혼하다.
1921 : 5월경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고 <백조>동인이 되다.
1922 : <백조>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스에서 2년간 수학, 이 시절에 함흥 출신의 유학생 류보화(柳寶華)와 교제함.
1923 : 관동 대진재 직후 한국인 학살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
1924 : 관동 대진재의 충격으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서울에 거처를 정하고 <백조>동인들과 교제함.
1925 : <빈촌의 밤>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경향파 문학에 가담함.
1926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70호에 발표.
1927 :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됨, 또 장진흥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사건에도 관련되어 고문과 폭행을 당하다.
1934 :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맡아서 경영하였으나 1년 만에 경영난에 봉착하여 포기함.
1937 : 당시 북경에 머물고 있던 독립투사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서 3개월간 머물다가 귀국, 귀국 직후 일경에 피검되어 고초를 겪음. 이후 대구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의 무보수 강사로 근무하는 등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음.
1943 : 4월 25일 위암으로 사망.
1948 :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계산성당에서 이상화 고택 가는 길의 인도에 새겨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묘소
이상화 묘소가 있는 월성이씨 문중 산소
이상화 묘 부근의 스카이뷰(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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