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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

노촌魯村 2010. 4. 24. 19:13

 

 

 

 

 

 

 

 

임고서원은행나무(臨皐書院銀杏나무.시도기념물 제63호 (영천시).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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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고서원(臨皐書院시도기념물 제62호 (영천시).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 36년(1603)에 중건(重建), 사액(賜額)되었다. 인조(仁祖) 21년(164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하고 영조(英祖)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선생(先生)을 추향(追享)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 현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地方官)의 비행(非行)을 근절(根絶)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濟)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고 시문(詩文),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정몽주초상(鄭夢周 肖像.보물  제1110호.경북 영천시  (국립경주박물관 보관))

경북(慶北)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소장되어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선생(鄭夢周先生)의 영정(影幀)은 3본(本)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제작년대, 필자, 세부의 묘사 등은 각기 다르다. 동일본(同一本)에서 중모(重模)되어 내려온 모본(模本)으로 모두 오사모(烏紗帽), 청포단령(靑袍團領), 각대(角帶)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며 포석(鋪席)과 배경은 묘사하지 않았다. 숭정기사모본(崇禎己巳摹本)은 견본채색(絹本彩色)에 169.5 ×98㎝의 크기이며 김육(金堉)의 작품(作品)으로 전해지는데 그림의 오른쪽 아래편에“숭정기사모본(崇禎己巳摹本)”이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1629년에 중모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 상(像)으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作品)으로 믿어진다. 오사모(烏紗帽)에 담청색(淡靑色)의 단령포(團領袍)를 입고 있는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으로 좌안팔분(左顔八分)의 안모(顔貌)를 하고 있고 연폭의 비단에 그려져 있는데 의습(衣褶)도 먹선이 아닌 청색선(靑色線)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면(全面)에 걸쳐서 비단이 떨어져 나오고 훼손(毁損)이 심한 편이나 고격(古格)을 지니고 있다. 현존(現存) 작중(作中)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작품(作品)이다. (문화재청 자료) 

 정몽주 초상 (鄭夢周 肖像.보물 제1110-2호.경기 용인시 경기도 박물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고려 말기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영일, 호는 포은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뒤 예조정랑, 대사성, 대제학, 문하찬성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으나, 조준, 정도전 등에게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다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몽주초상>의 화면 왼쪽에는 가정(嘉靖) 000고본(皐本)‘ 오른 쪽에는 '포은(圃隱)000상(像)’ 이라고 쓰여 있다.『포은집』을 참조해 보면, 왼쪽 상단의 표제는 ‘가정을묘임고본(嘉靖乙卯臨皐本)’일 것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1555년(명종10)에 이모된 본으로 추정된다. 『포은집』(권2, 엽8) 화상 항목에 의하면, 정몽주의 초상화는 1390년(고려 공양왕2)에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입각도형되었을 때의 본이 처음이라고 한다. 현재 이 원본은 전해오지 않는다. 이 원본으로부터 이모한 본들이 임고서원과 경기도 용인시 모현동 포은선생영당, 전라남도 장흥군 용강영당, 국립중앙박물관(이한철 중모본)과 서울대학교 박물관(초본)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정몽주의 초상화는 모두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애초 동일한 본(좌명공신도상)으로부터 모사하였으므로 상용형식(像容形式)이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1555년(명종10)에 좌명공신상으로부터 직접 이모한 본이 임진왜란 후 너무 해어지고 버지게 되자 1629년(인조7) 당시 서원의 유림들은 새로이 모사하도록 하였으며, 1629년에 제작된 이 <정몽주초상>은 현재 보물 제1110호로 지정(1991년 12월)되어 있다. 지금 이 경기도 박물관 소장 <정몽주초상>은 1555년에 이모했던 구본(舊本)으로 추정된다. 그 동안 영일정씨 종가에서 줄곧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한다.  화폭은 3폭이 결봉(結縫)되어 고식을 보이고 있다. 2007년 수리시 뒷면을 확인한 결과 사모, 얼굴, 단령 뿐 아니라 족좌대(발받침대)에 이르기까지 넓게 배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초상화는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는 좌안 9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흑색의 사모는 帽頂이 낮고 둥글며, 좁은 兩角은 아래로 쳐져 있다. 단령을 원래는 靑袍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퇴색이 심하여 거의 회색계열로 보인다. 목선이 밭으며 소매통이 좁은데, 이런 형태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다. 허리에는 鈒金帶를 두르고 있다. 얼굴은 옅은 살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눈, 코, 입의 일부는 박락되어 있다. 특히 왼 쪽 눈은 반도 안남아 있을 정도로 박락이 심하여 특히 유감스럽다. 갈색 필선으로 이목구비와 얼굴 주름만을 간략하게 형용하였다. 오른 눈을 보면, 검은 선으로 위 아래 눈꺼풀을 형용하였으며, 눈 안쪽에 아주 옅게 담묵을 칠하고, 홍채도 담묵으로 처리하였다. 아래 위에 속눈썹은 전혀 그려 넣지 않았다. 코의 형용은 어느 정도 보이며, 입은 어두운 적색을 묘사하였는데, 윤곽선을 따라 담묵으로 덧그었으며, 입술색은 아주 흐리게 칠하였다. 또한 단령의 윤곽선과 주름은 가늘고 예리한 묵선으로 묘사하였으며, 양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주름 선들은 세로 선과 가로선을 교차시켜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의자에는 북은 방석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의자에 비끄러맨 맨 자색의 방석 끈이 눈길을 끈다. 족좌대 위에는 흑피화를 신은 발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놓여 있으며, 족좌대 윗면과 바닥에는 아무 것도 깔려 있지 않다. 복제와 모제, 그리고 얼굴의 간결한 묘사와 의자의 방석 끈, 같은 방향으로 놓여진 양 흑피화, 단령의 트임 사이로 첩리와 답호가 겹겹이 내보이는 점 등은 전체적으로 <이천우초상><이색초상> 등 고려말 조선초의 공신도상에서 살필 수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국의 대표적 문인이자 충절의 인물인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주목될 뿐 만 아니라, 비록 고려말 조선초에 제작된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의 양식적 특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조선중기로 올라가는 이모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 동안 가장 오래된 정몽주 초상으로 알려져 왔던 보물 제1110호본 보다도 70년가량 앞선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