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영천

도계서원(道溪書院)

노촌魯村 2011. 12. 29. 01:29

아래 모든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도계서원은 조선 인조~선조 때의 노계 박인로 선생(1561-1642)의 사후에 후학들이 그의 덕을 기려 선생의 고향인 도계에 세운 서원이다. 노계선생의 산소가 바로 지척에 있고, 서원 입구의 좌측에는 노계가(蘆溪歌)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박인로(朴仁老, 1561-1642)는 조선의 무인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翁)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영천(永川)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태평사(太平司)》를 지었다.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거제도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뒤에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1630년(인저 8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박인로가 남긴 중요한 작품으로는 《누항사(陋巷詞)》,《선상탄(船上歎)》등이 있다. 부모상에 다같이 3년씩 여묘(廬墓)를 살아 그 효심도 매우 깊었다 전하고 있다.

早紅枾歌

盤中 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이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새 글로 설워하노라

소반에 놓인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 갈 마음이 있지마는품어 가도 반가워해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를 서러워합니다.

 

蘆溪歌 碑

蘆溪歌 :  박인로가 76세 때 쓴 작품이다. 총 208구 93행이다. 박인로가 남긴 7편의 가사 가운데 최후의 작품으로 『노계집(蘆溪集)』에 수록되어 있다.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곳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주관적인 심회를 읊은 것이 중심내용을 이룬다. 아울러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한 작자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의 서두는 늙은 몸이 되어 평생소원이던 산수를 찾아드는 감회로 시작된다. 이어서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고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삶의 흥취와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는 강호 자연에 묻혀 태평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은 모두가 성은(聖恩) 때문이라는 것과 우국일념을 잊지 않는 충정을 말하였다. 이어서 결론으로 작자의 소망을 하늘에 기원하고 강호생활과 더불어 늙을 줄을 모르는 자신의 현재적 삶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박노계집판목 (朴蘆溪集板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383)

인조 때의 시인 노계 박인로(1561∼1642)의 문집인『노계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목판이다.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선전관을 거쳐 만호(萬戶)를 지냈고,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노계집』은 한시문과 가사, 시조 등을 수록한 3권 2책으로 목판 수량은 99매이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가」 등 68수의 시조는 지금까지 전해져 국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목판은 당시의 인쇄문화사 연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蘆溪 묘소

 蘆溪 묘소

위의 모든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