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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광성보(廣城堡)

노촌魯村 2010. 11. 11. 08:05

 

광성보(廣城堡.사적  제227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이곳은 사적 제227호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 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이다. 불은면 덕성리 해반에 소재하고 있으며, 강화해협과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화장실 위치가 무기고였다고 전한다. 과거에는 감나무 아래 기와가 수북하였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을 경작하다가 대포탄환을 무더기로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광성보는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되기 시작한 1658년에 설치되었는데 1679년 돈대를 쌓을 때 화도돈·오두돈·광성돈이 함께 축조되었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안해루라 하였다. 그후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즈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순국하였다. 이때 어재연 장군과 휘하 전수비군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쌍충비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광성보에 있다.(강화군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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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년(1871) 미국의 아세아함대( 신미양요 )가 이 성을 유린하여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연장군 이하 전 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인원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 내에는 신미양요시 순국한 순무천총 어재연, 동생 어재순의 쌍충비와 무명용사들의 합장 묘인 신미순의 총 그리고 1977년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비 등이 있다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을 비롯한 군관과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에서 어재연 형제의 시신은 고향으로 보내고 이름모를 51명의 시신을 7개의 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며,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신미양요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헤아려 보니 350여분이 전투에 임했는데 50여구의 시체 밖에 없었다. 사상자 중에는 몸에 부상을 당했을 경우 미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해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신 분들의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분들의 시신을 화장시켜 한묘에 7-8분씩 함께 합장한 곳이다. 이 비는 소자로 「辛未洋擾戰七將兵侍郞」 대자로「殉節墓壇」이라 쓰여있다.

 

 

 

 

 

용두돈대 성곽총구에서 바라본 염하. 염하는 김포와 강화섬 사이를 흐르는 300∼500m의 해협이다.광성보 용두돈대 앞 염하(鹽河)는 물살이 세다. 꾸르릉! 꾸르릉!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강폭도 다른 곳보다 100여 m는 좁다. 강 저쪽은 김포의 덕포진이다. 손돌은 고려 고종임금(재위 1213∼1259)을 배에 태우고 가던 뱃사공 이름이다. 고종은 이곳 급류를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배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배가 자꾸만 급류 쪽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뱃길을 훤히 꿰뚫고 있던 손돌은 “보기에는 그렇지만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일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더욱 의심이 들어 손돌의 목을 당장 베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어가면서까지 말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일 것이다.” 손돌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고종은 ‘아차!’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리 없었다. “고이 장사 지내주라”며 멋쩍어할 뿐이었다. 손돌의 묘는 물 건너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에 있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이곳 강화해협에는 큰 바람이 분다. 날씨도 매섭다. 이른바 ‘손돌바람’ ‘손돌 추위’다.  


손돌의 민담에서 나온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誇)를 한 수 소개한다.

    

사공은 억울한 죽음을 죽으며

그나마도 선심을 발휘하며

나는 원통하게 죽거니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 흘러 가는 것만 따라가면 왕은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혼이 바람에 들어 이 바다에 떠돌면서

해마다  그 날이 오면 분하여 운다 하네

그 왕도 간지 오래니 잊어버리고 말려므나

손돌이 어진 사공 제 죽음 한 함이랴

고국정한(古國精限)을 풀어도 남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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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바람 설화 바로가기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son-do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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