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서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노촌魯村 2011. 3. 26. 10:54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보물  제361호.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탑비로, 보리사터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대경대사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여의주를 물고 일어선 납작한 돌거북 받침과, 거대한 비머리돌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균형을 잃고 있다. 그러나 머릿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공적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으며, 대사의 제자인 최문윤이 글씨를 새겼다. 글씨에는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데서 오는 강인함이 묻어나는데, 고려 전기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는 부분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태조 22년(939)으로,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문화재청 자료)

 

 

 

 

 

(전)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傳 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보물  제351호.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산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문화재청 자료 사진)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사리탑이다. 대경대사(862∼930)는 통일신라 경문왕 2년(862)에 태어나 9세 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그후 교리보다는 참선에 뜻을 두어 성주사의 무염대사에게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 수 년동안 정진하다가 효공왕 13년(909)에 귀국 후 소백산에서 은거하던 중 고려 태조의 부름으로 보리사의 주지가 되었다. 태조 68세로 입적하니, 태조는 그의 시호를 ‘대경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1913년 경기도 양평군 보리사터에서 서울로 옮겨왔는데, 이때 바닥돌이 떨어져 나가 현재는 새로 만든 바닥돌 위에 놓여 있으며, 기단부(基壇部)위에 탑의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덮어 놓은 전형적인 8각 사리탑이다. 기단의 아래받침돌은 여러 단이 8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자상과 구름, 연꽃조각 등을 돌아가며 조각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구름조각으로 나뉜 각 면에 사람의 머리에 새 몸을 한 상상속의 새를 1구씩 도드라지게 새겼다. 윗받침돌은 아래에 비해 넓고, 위로 3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앞뒤 2면에 문짝모양을 새겼으며, 그 양옆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나머지 2면에는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비천상과 꽃장식을 번갈아 도드라지게 조각했고 각 경사면은 움푹하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에는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각 부 구조가 가지런하여 품위가 있으며, 조형과 균형미가 뛰어나다. 같은 터에서 발견된 대경대사의 사리탑비가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으므로, 이 탑 역시 그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