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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려 공조전서 금은공 조열(趙悅) 신도비(神道碑)

노촌魯村 2011. 4. 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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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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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典書趙公諱悅咸安人年代旣邈文獻無徵字號及生卒履歷皆不可攷謹案咸州
誌曰趙悅三司政堂文學烈之玄孫始居平廣後移山八里院北洞善琴畵月夜彈琴聲
聞數里畵亦流轉於世又案其世譜有曰棄官歸鄕專心所事又曰恭愍朝官至工曹典
書遞我 聖朝龍興以嘉善大夫工曹典書徵而不復仕嗚呼當勝國之末圃牧尙矣其餘
往往泯其迹以自晦甘與草樹同腐公豈其人歟端廟時公之孫旅在太學揖諸生歸終
身不復出是所稱生六臣漁溪處士贈吏曹判書就伯夷山下建祠與五公者亨焉公之
四百年湮而不章豈亦有幸不幸存焉耶向所謂琴畵是眞有托而逃焉者而其見於世
譜者亦引而不發若有待乎後世之子雲及東浦孟文貞思誠所謂洪晩隱載之狀出而
公之隱德微行稍稍始顯其狀略曰一夜判書成萬庸評理事卞斌博士鄭夢周典書金
成牧大司成李穡等不期而會把酒論懷牧隱曰殷有三仁比干死微子去箕子爲奴各
自隨意行之皆曰諾晩隱遂決意歸田至三嘉大坪村卜居命名爲杜尋洞有咸安人典
書趙悅進士李午嘗以竹杖芒鞋相往來以傷時事麗朝訖與二公會于雲衢仍以悲
歌哀詠而歸人譬之麥秀採薇之歌云嗚呼晩隱之狀迨若爲公而發豈非天哉且其盍
簪聯句曰幽篁園裏數叢花潤色山村寂寞家入室更看樽有酒宦情從此薄於紗其辭
愈婉其迹愈微其志愈堅於是乎公之爲公庶幾俟百世而無疑矣宜其以漁溪爲孫也
公墓在防禦山東麓乾坐原后夫人蔣氏祔元配田夫人墓失傳公之先三世曰密直司
三司左尹諱禧曰參軍 贈參知政事諱之興曰版圖判書諱天啓公之四子曰彛神號衛
曰寧縣監曰桓曰安不仕安之子曰漁溪後孫幾累千數或以名節或以經術而著焉又
有以文行名於世科宦顯於朝多不能盡記而國有寇亂又多前後立世稱一門十忠噫
其盛矣豈不是公之遺風餘敎有以啓牖之也近有大石出於公墓下其尺度正合於大
碑是必漁溪以下諸公爲之磨礱運置以待夫後之人也石微物也而與公之顯晦同其
終始尤豈不異哉諸子孫將謀竪隧道求余爲記實之文采何敢當采王父陶菴文正公
於漁溪碑銘誦石潭先生之言而結之曰使後世不復知有金時習抑何憫焉亦可謂得
公之心矣然公之所秉大義卽所謂撑天地亘萬古而不能易者公雖欲自泯其不可泯
者天也采於公亦以是結之可乎雖然公私秘藏愈久愈出卽公之事實終必有大顯之
日盍姑俟之顯晦有數遲速有時銘曰迹公之世哀彼黍離誰與友者其歌也悲有孫
食伯夷山下厥後忠賢一何盛耶晦而後顯亦理之常我銘斯石用昭無疆
參判 李  采  撰 
 
(번역문)
고려조에 전서 벼슬을 지낸 조공(趙公)의 휘는 열(悅)이며,함안인 이었다. 년대가 너무나도 오래되어 고증 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서 자(字)와 호(號) 생졸(生卒) 년 월과 또한 이력 등은 잘 알 수는 없으나 함주지(咸州誌)를 살펴보면,조열(趙悅)공은 삼사정당 (三司政堂)을 지낸 조열(趙烈)공의 현손으로써 처음 평광리에 살다가 뒷날 원북동으로 이사하였다. 거문고를 잘 탔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달이 밝은 밤이면 거문고 소리가 멀리까지 울렸으며 그림도 세상에 넓게 전해졌다고 한다, 또한 세보(世譜)에 보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음 내키는 일에 전렴 하였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관직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조가 건립되자 은거하였음에도 나라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초빙(招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알려지기를 고려말엽에는 정포은 몽주(鄭圃隱 夢周)과 이목은 색(李牧隱 穡)의 행적(행적(行績))이 가장 빛나나 그 외의 인사들은 간혹 그 흔적을 스스로가 숨겨 풀과 나무처럼 썩어 없어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공 또한 그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단종(端宗) 때에 공의 현손인 려(旅)께서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중 동문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고향으로 돌아 와서 종신토록 다시 세상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생육신으로 지칭되는 어계처사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贈職)받았으며 백이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여 나머지 다섯 분과 함께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공의 행적이 사백년 동안을 파묻혀 들어나지 못한 것은 행과 불행이 공존했던 것이 아닐까? 앞의 거문고와 그림 이야기는 진정으로 이에 의지하여 어지럽던 세상을 피했던 것이며, 세보에 나타난 부분도  또한 이를 발현하지 못했음은 훗날의 자운(子雲)과 동포(東浦)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홍만은(洪晩隱) 재(載)의 행장(行狀)이 발견되기를 기다렸던 것이었을까?
그 행장이 출현됨으로써 공의 숨겨졌던 덕과 행실이 점점 들어나게 되었다. 그 내용의 개략은 어느 날 밤에 판서 성만용(成萬庸)과 평이사(評理事) 변빈(卞)과 박사(博士) 정몽주(鄭夢周)와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과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등이 우연히 함께한 자리에서 술을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었을 때, 목은 이색이 말하기를 "중국의 은(殷) 나라 말기에 세 어진 이가 있었는데 그 중 비간(比干)은 죽임을 당했고 미자(微子)는 망명하고 기자(箕子)는 노복이 되었다하니 각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어떨지?”하니 모두가 받아드렸다. 홍만은재(洪晩隱 載)는 고향 땅으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하여 삼가의 대평 마을에 터를 잡고 여기를 두심동이라고 불렀다. 함안인 전서 조열(趙悅)과 진사 이오(李午)가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서로 왕래하면서 세상사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으며 고려조가 멸망하자 운구(雲衢)땅에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며  비창하게 노래를 부르고 애절하게 시를 읊고 돌아가니 주위에서는 맥수채미가(麥秀採薇歌)와 같다고 하였다.
아아 ! 만은(晩隱)의 행장(行狀)이 공에게 이르러서야 발견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라 아니하겠느냐? 또 서로가 회합하여 읊은 시구에 이르기를 “깊숙한 대밭 속 몇 떨기 꽃. 산촌 적막한 집 곱게도 단장했네. 방에 들어가 보니 두루미에 술이 가득. 벼슬하고픈 생각 비단처럼 엷어 졌다오.”하였으니 그 언사 더욱 은근하고 그 흔적 더욱 미세하며 그 의지 더욱 견고하니 이를 보면 공의 성정(性情)은 백대가 지난 후에도 의심 할 바 없이 알 수 있으며 바로 어계와 같은 훌륭한 손자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공의 묘소는, 방어산 동쪽의 건 좌 언덕에 위치하며 후배인 장씨(蔣氏)부인과 합폄이며, 전 부인 전씨(田氏)묘는 실전 되었다.
공의 증조부는 밀직사 삼사 좌윤(密直司三司左尹)을 지낸 휘 희(禧)요, 조부는 참군(參軍)을 지내고 증직이 참지정사(參知政事)였던 휘 지흥(之興)이요,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휘 천계(天啓)였다. 아들 넷을 뒀는데 이(彛)는 신호위(神號衛)요, 영(寧)은 현감이며, 셋째는 환(桓), 넷째는 안(安)이었는데, 벼슬을 하지 않았다. 안(安)의 아들이 어계였으며, 후손의 수가 수 천 명이 되어 혹은 명절(名節)로써 혹은 경술(經術)로써 저명(著名)하였으며, 또한 학문과 행의(行誼)로써 유명한 분과 급제하여 고위직에 오른 이의 수가 많아 모두를 기록 할 수 없으며, 전후하여 나라에 많은 환란이 있었을 때 충절로써 공을 세운 열 분의 충신이 한 문중에서 배출되었으니 감탄을 금할 수 없구나,그 성대 함 이여! 이 모두가 공이 남긴 유덕(遺德)과 교훈(敎訓)으로써 이뤄졌던 것이다. 근간에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공의 묘소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척도가 큰 비를 만들기에 적합하였다. 이는 필연코 어계 이하 여러 자손이 힘써 갈고 다듬어 여기에 옮겨 두고 후세에 비석으로 사용 할 것을 계획 했던 것 같다.
본대 생명력이 없는 돌이 공과 현회(顯晦)를 함께 하니 어찌 이상하다고 아니 할 수 있겠느냐 ? 자손이 비를 세우기를 의논하여 나께 비문을 청해 오니 어찌 감당 할 수 있으랴?
마는 나의 조부인 도암(陶菴) 문정공(文正公)께서 어계의 신도비명을 쓰면서 율곡(栗谷)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끝맺음을 후세에 김시습(金時習) 이 존재했던 것을 다시 알려서는 아니 된다 하더라도 어찌 이를 민망하게 생각하리오? 하였으니 그의 심사를 모두 이해한 진실한 말이라 하겠다.
공이 지켜낸 큰 의리는 곧 천지를 지탱하고 만고에 뻗쳐 바꾸어질 수 없는 것이니, 비록 공이 스스로 그 흔적을 민멸(泯滅)시키고자 한들 민멸(泯滅) 시킬 수 없는 것은 곧 하늘의 뜻이다, 내  또한 공에 대하여  이렇게 맺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사(公私)간의 사정으로 비장되었던 사실들이 더욱 많이 발견되어 명성이 크게 들어 날 때를 기다리나니, 들어 나고 들어 나지 않음은 운수의 작용이요, 빠르고 늦음은 또한 때의 흐름에 있다.
명 왈 “공이 처한 세정은 나라의 멸망 애통했네, 누구와 함께 벗 할 손가? 그 노래 슬프기 만 하네, 자손이 향사(享祀) 올리니 백이산 아래 일세, 그의 뒤 충신과 현사(賢士)가 번성 했네, 나타나지 못한 사실 뒤에야 들어 남은, 평상적인 순리라네, 나 이 돌에 명을 색이니 ,무궁토록 빛이 훤 할걸세.

참판 이 채 (李 采) 짓다. (신도비문 출처 : 함안조씨역사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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