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보물 제6호.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9-3)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귀부(龜跌)와 이수(이首)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碑身石)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高達禪院)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諦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년(921)에 환국(還國)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居住)하였다.
그후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入寂)하니 왕이 애도(哀悼)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慧眞)이라 추시(追諡)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大師)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龜跌)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 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이수(이首)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자료)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高達禪院)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諦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년(921)에 환국(還國)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居住)하였다.
그후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入寂)하니 왕이 애도(哀悼)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慧眞)이라 추시(追諡)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大師)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龜跌)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 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이수(이首)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자료)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
1972년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탑비 상태
고달사지(위의 모든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신라 이래 삼원(왕실의 비호를 받는 부동사원(不動寺院)) :
고달원(高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은 경북 문경의 봉암사를 중심으로 한 희양산문(曦陽山門)
도봉원(道峰院)은 도봉산의 영국사(寧國寺 : 現 도봉서원 자리)
고달원(高達院)은 여주 고달사
[비문]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 元宗大師慧眞塔碑)
바로가기 : http://blog.naver.com/3sang4/40105485726
여주군史 바로가기 :http://history.yj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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