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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

노촌魯村 2011. 11. 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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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頭輪山)에 자리한 대흥사(大興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절 이름은 1900년대 초에 대흥사였다가 근래 대둔사(大芚寺)로 불렀는데, 최근 대흥사로 바꾸었다.
절은 교구 본사인 까닭에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산대사의 유품을 간직한 절로도 이름나 있다. 또한 절은 문화재가 다량 소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연담 유일(蓮潭有一)이라든가 초의 의순(草衣意恂) 등 저명한 스님들이 머물렀던 절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오늘날 유행하는 다도(茶道)의 고향으로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활을 다해온 도량이다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대흥사 자료)

 

 

초의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海南 大興寺 西山大師塔.보물 제1347호.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6)  

이 탑은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석조탑으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 높이는 2.7m이다.

지대석은 8각인데 그 위의 하대석에는 8잎의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상대석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위로 향한 연꽃무늬 8잎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었다. 탑신 전면에 ‘청허당’이라 새겨서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밝혀 놓았다. 옥개석은 목조건축 양식에서 보여지는 기왓골·겹처마 등이 표현되어 있다. 또 추녀마루 끝에는 귀꽃 대신에 용두(龍頭)가 표현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상륜부는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높은 보주형(寶珠形)을 이루었는데, 표면에 가득 조각 장식을 하였다.

인근에 있는 서산대사 탑비가 조선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이 탑 역시 이때를 전후해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갖춘 석조탑으로, 각 부분에 표현된 다양한 조식은 다른 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일면을 지니고 있는 등 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해탈문[解脫門]

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不二門)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한다.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있으며,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되어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대흥사 자료)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대흥사 자료)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대흥사 자료)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자유분방함을 잘 보여주는 행서체 글씨인데,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길에 이를 보고 바꿔 써 걸어야겠다고 했다가 유배가 끝나고 올라가는 길에 그냥 걸어 놓으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군 대흥사 대웅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서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최근에는 1969년 중수되었으며, 절 아래쪽인 북쪽에 있다.
《대둔사지》 권2와 <대둔사대웅전중건기>에 의하면 1667년(현종 8)에 심수대사(心粹大師)에 의하여 3년만에 중건되었다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99년(광무 3)에 대웅전이 서 있던 북원 전체가 불에 타자 1901년(광무 5) 법한(法翰)대사가 화주가 되어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또 1967∼1969년 사이에 기와를 새로 얹고 단청을 하기도 했다.
편액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자유분방함을 잘 보여주는 행서체 글씨인데,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길에 이를 보고 바꿔 써 걸어야겠다고 했다가 유배가 끝나고 올라가는 길에 그냥 걸어 놓으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안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아미타·약사여래가 좌우로 협시한 목조삼세불이 있고, 불화로는 삼세후불도를 비롯해서 감로도·삼장도·제석천룡도·칠성도가 있다. 불화는 전부 1901년(광무 5)에 봉안된 것으로, 취운 혜오(翠雲慧悟)가 1901년에 쓴 <대웅보전중수기>에 의하면 관찰사 윤웅렬(尹雄烈)과 해남군수 이용우(李容愚)가 대웅보전의 중건 때 대시주가 되었다고 했는데, 후불도의 화기에도 도감(都監)으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1703년(숙종 29)에 봉안된 동종이 있는데, 보적사에서 처음 봉안된 것이다.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편액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대흥사 자료)

 

 

 

 

응진당· 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ㆍ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 1917년 헌괘되어 있음을 살필 때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2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2익공으로 건물 전면에 1ㆍ2분합의 빗살문을 단장하고 측ㆍ배면에 막돌과 흰줄눈친 담장과 단청으로 장엄하였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그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한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그 중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어 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ㆍ판관ㆍ사자ㆍ인왕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ㆍ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 봉안하였다.(대흥사 자료)

     

 호남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 글씨

 


 천불전 기도 영험 유래 (千佛殿 祈禱 靈驗 由來)

이곳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흥사)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분의 부처님 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에 표착 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 불을 실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 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 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 줄 것을 현몽 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 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입니다.
이글을 접하시는 여러분들께서도 千佛殿 기도를 통한 영험을 성취 하시 바랍니다.

千佛殿 懸板 (천불전 현판, 조선후기 원교 이광사 친필)

千佛殿 柱聯 (1917年 오인당 안규동 전서 古 예서체 친필)

(世尊坐道場)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 마치 천개의 해가 떠서
(照耀大千界)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千佛殿 으로 들어서는 門인 가허루(駕虛樓, 懸板 글씨는 全州出身 蒼岩 李三晩先生 親筆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千佛殿 앞산의 悟道재 능선과 千佛殿 뒷산의 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세상(此岸)과 부처님의 세계(彼岸)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르는 뜻이다.

[천불전(千佛殿)_시도유형문화재 52호, 1974년 9월24일 지정 ]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낮은 기단(基壇)에 세운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기초(基礎) 위에 일부 괴목(槐木)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보이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작(多包作)을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하였고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2짝이다.

내부 중앙에 목조(木造)의 본존불(本尊佛)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주위에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千)의 작은 불상을배열(配列)한 것이 특이(特異)하다. 기록에는 순조(純祖) 11년(1811) 불탄 것을 동(同)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 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 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대흥사 자료)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 는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대흥사 자료)

 

 

초의선사

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신라 때 부터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 오던 우리나라의 다도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초의선사 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하였다. 초의선사는 < 동다송 >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당시 대흥사 주변의 유명한 다인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다도의 이론과 실제의 양 면에서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켰다. 초의에 있어서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초의선사 의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었다.(대흥사 자료)

 

東茶頌

 

표충사 (表忠詞.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다.  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ㆍ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ㆍ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ㆍ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대흥사 자료)

서산대사는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여 제삿날에 재를 받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한다. 그리고 두륜산은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비록 명산은 아니지만 기이한 화초가 언제나 아름답고 옷감과 곡식이 넉넉한 곳이며, 왕의 교화가 제대로 미치기 힘든 먼 곳이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칠 수 있고, 처영(處英) 등 여러 제자들이 남방에 있으므로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은 바로 대흥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자들은 삼년상을 치른 후 서산대사의 유물을 챙겨서 대흥사로 모여들었다. 우선 영잠(靈岑)대사가 1607년(선조 40) 스승의 유품인 금의(錦衣)와 벽옥발(碧玉鉢)등을 절로 갖고 왔으며, 이듬해 기일(忌日)에는 이 유물들을 받들어 놓고 재를 올렸다. 이어서 진영을 모시는 영각을 짓고 1631년(인조 9)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장유(張維, 1587∼1638)가 지은 서산대사의 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1655년(효종 6)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의 발우와 신발, 가사 등을 절로 가져 왔다고 한다. 이렇게 서산대사의 유품과 진영이 봉안되고 비석이 세워지면서 절은 서산의 문도들이 모이는 중심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서산의 문도들은 조정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대흥사와 보현사에 서산대사의 사액(賜額) 사당을 건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1788년(정조 12) 대흥사에는 표충사, 보현사에는 수충사(酬忠祠)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듬해에 사당과 영정(影幀)이 이루어지자 정조는 사액을 내리고 제문을 지어 보냈으며 이후에도 자신이 직접 쓴 <어제서산대사화상당명(御製西山大師畵像堂銘)>을 내려 보냈다. 이리하여 대흥사는 조정으로부터 면세 혜택과 더불어 제수도 공급받았으며 서원 사찰로서 인근 유생들의 침탈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근에 있던 선암사나 송광사와 당당하게 사격을 겨룰 만큼 그 지위가 향상되었다.(대한불교진흥원 자료)

 

 

서산대사 휴정 [休靜, 1520-1604.1.23]
본관 :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
속성 : 최(崔)
자 : 현응(玄應)
법호 : 청허(淸虛), 서산(西山)
아명 : 여신(汝信)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하여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지만
1594년(선조27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표충사(表忠 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담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豊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
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기허대사


본관 : 밀양
속성 : 박(朴)
속명 : 영규(靈圭)
법호 : 기허당(騎虛堂)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표충비각

 

 

 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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