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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백련사 (康津 白蓮寺)

노촌魯村 2011. 11. 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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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백련사 (康津 白蓮寺.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만경루(萬景樓)

 만경루(萬景樓) 통로의 도자기풍경

 만경루(萬景樓) 현판

만덕산

 

만경루(萬景樓) 통로에서 본 대웅보전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大雄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만덕산에 위치하는 백련사는 만덕사라고도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에 지은 절이다. 백련사 대웅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안에는 석가모니불상이 모셔져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벽화

  

안수정등(岸樹井藤)

가운데 벽화(다섯 방울의 꿀에 취하여) 해설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譬喩)

옛날 어느 곳에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넓은 벌판을 지나다가 미친 코끼리(위의 벽화에서는 사자)와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놀라서 달아나려 했지만 넓은 벌판이기에 숨을 마땅한 곳을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들판 한 복판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었고, 그 우물 안에는 한 줄기 등나무 덩굴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하늘이 주신 것이라 기뻐하고서 급히 그 등나무 덩굴을 타고 우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코끼리는 긴 상아를 무섭게 내밀었지만 우물을 들여다 볼 뿐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는데 무서운 큰 뱀이 우물 밑바닥에서 입을 척 벌리고 나그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놀라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는 네 마리 독사가 그를 금방 물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목숨을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한 가닥 등나무 덩굴뿐인 데 그 덩굴마저 검은 색과 흰 색 쥐 한 마리 씩이 뿌리 앞 쪽을 갈근갈근 이빨로 갉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떨고 있는데 그 때 마침 덩굴 뿌리에 붙어 있는 꿀벌 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씩 다섯 방울이나 그의 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꿀맛이 기막히게 맛있었던 탓인지 나그네는 그 때부터 벌써 눈 앞에 닥쳐온 무서움과 위험을 까맣게 잊고 그저 꿀물을 받아먹는 데만 마음이 쏠리게 되었습니다.

나그네 :  먼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무작정 벌판을 헤매는 나그네는 바로 나(우리)

벌판 : 태어나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터전.

미친 코끼리 : 무상(無常)의 풍파

우물 : 생사의 깊은 못. 물과 같은 우리들의 은신처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그런 곳

등 덩굴 : 생명선

큰 뱀 : 죽음의 그림자

네  마리 독사 : 우리들 육체를 구성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원소

쥐와 흰 쥐 한 마리 씩 : 밤과 낮에 해당

다섯 방울의 벌꿀 : 우리들 오욕(五欲). 환락(歡樂)의 근원. 식욕.색욕.수면욕.재산욕.명예욕

안수정등(岸樹井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공포

 

 

 

    

명부전

 

 

 

응진전

 

 

 

 천불전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보물 제1396호 )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190㎝×110㎝이다.
비신은 2면비로 전·후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을 양각했다. 비신 전면의 상단에는 자경 15㎝ 크기의 전서체로 「만덕산백련사비」라 새겼고, 횡서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라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랑선군 이우(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랑원군 이간(?∼1699)이 썼다.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에는 우진각지붕의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 건축의 겹처마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정상에는 2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 바,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118㎝×29㎝이며, 이수는 170㎝×75㎝이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연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의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라 하겠다. 따라서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석비가 비록 시대를 달리하고 있지만, 각 부재가 지닌 양식상의 특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문화재청 자료)

 

 

 

 

    

   

 

 

  

    

 

강진백련사원구형부도 (康津白蓮寺圓球形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백련사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탑은 네모난 기단(基壇)위로 공 모양을 한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특히 탑신의 맨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둔 구슬띠를 새겨 놓아 시선을 모은다. 이 절내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양식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백련사에서 본 강진만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늘 길(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 가능.DAUm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후 편집)

 

 

천일각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m. 도보로 40분 정도 거리

    

   

     

        

강진만도 보이고...  



  

차밭

차꽃 피는 계절이라 차꽃도 보고(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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