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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명당영정 (泗溟堂影幀)

노촌魯村 2011. 12. 5. 21:18

 

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豊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
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보물 제1505호.대구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문화재청 자료)
ㅇ 규격(세로x가로) : 122.9 x 78.8cm

 

 

 

압곡사선사영정(鴨谷寺禪師影幀.대각등계홍제존자사명당. 경북문화재자료 제239호.경북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674) 

사명당의 초상화로, 액자의 크기는 가로 82.5㎝, 세로 126㎝이다. 승복을 입고 얼굴과 몸을 오른쪽으로 향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불자를 쥐고 있다. 화폭의 오른쪽 윗부분에 사명당의 상임을 밝히는 글과 함께 지운영이 쓴 3줄의 찬이 실려있다.(문화재청 자료)

 

 

사명당영정 (泗溟堂影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2호.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조선시대 승장이었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의 영정으로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방형격자문이 장식된 녹색 상단부 벽면과 돗자리로 구성된 이단구도이며 녹색 장삼에 적색 가사를 수하고 왼손에는 용머리가 장식된 불자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팔걸이 위에 얹고 있다. 불자의 머리장식과 가사의 연결고리(環)는 금분으로 채색하고 화려함을 부각시키고 주조색인 녹색과 적색의 대비효과를 살리면서 승장으로서의 기상을 잘 표현하였다. 화면 상단 향좌측에는 주지백서(朱紙白書)의 ‘대광보국숭록대부홍제존자사명당대선사지진(大匡輔國崇祿大夫弘濟尊者泗溟堂大禪師之眞)’의 화제와 풍원군 조현명(1690-1752)의 영찬이 있다. 화면크기는 가로 81.2cm, 세로 124.0cm이며 세 폭의 비단으로 이어져 있다.(문화재청 자료) 

 

함양용추사송운대사영정(咸陽龍湫寺松雲大師影幀.경남 문화재자료 제326-3호.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962)

 조선 중기의 고승인 송운대사(1544∼1610)의 초상화이다. 송운대사의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종봉(鍾峯)이고, 다른 이름은 사명대사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순안(順安)에 가서 휴정과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아왔다.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려진 것으로, 향좌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족좌대(足座臺)를 하고 있다. 왼손에는 불장자를 어깨에 걸친 채 쥐고 있고, 오른손은 의자 손잡이 부분을 살짝 쥐고 있다. 얼굴부분은 황백토를 칠했으며, 윤곽선은 가는 먹선을 사용하였다. 머리부분 표현은 담묵으로 바림하고, 그 위에 가는 먹선과 백선으로 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승복은 남색과 먹색을 혼합한 어두운 회색이며, 그 위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雲寶文)을 장식하였다. 입고 있는 옷과 의자는 대체적으로 엷게 채색되어 밑그림선이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였다. 바닥에는 화문석을 배치하여 바닥과 배경을 구분하였는데, 화문석은 바탕에 호분을 바른 뒤 가로로 옅은 갈색 혹은 죽도(竹刀)로 세선을 그어 결을 나타내고 있다. 배경은 녹청색 바탕에 가는 담묵선으로 운보문을 가득 메워 장식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정조 5년(1781)에 조성된 함양용추사무학대사영정과 인체비례·채색법·선묘처리·귀의 묘사·화문석과 배경처리 등의 표현기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 혹은 적어도 18세기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양 용추사 송운대사 영정은 18세기 조사영정을 연구하는데 학술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

 

 

 

 

 

 

 

 

 

영은사사명당대선사진영(靈隱寺四溟堂大禪師眞影.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1호.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성보박물관) 

 

 

 

 

       

합천홍제암임난삼화상영정 (陜川弘濟庵壬亂三和尙影幀.경남 유형문화재 제359호.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21)

홍제암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 청허당 서산대사를 비롯한 세 분의 선사 영정이다. 세 분의 선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 특히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이곳에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정을 중심으로 왼쪽에 기허당대선사영정이 있고, 오른쪽에 사명당대선사의 영정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은 녹색 장삼에 홍색가사를 입고 있는데, 안정감있는 자세와 당당한 풍채 및 위엄있는 얼굴에서 승병장으로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기허당의 영정은 짙은 갈색 배경에 붉은 색의 등받이에 녹색의 장삼만을 입고 있는데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다리는 세우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활약을 한 삼화상의 영정은 전체적으로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장식적인 면을 배제하고 인물 각각의 개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뛰어난 색감으로 화면의 품격을 높여 주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안보연 연구사(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겨울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있다면, 초여름에는 석가탄신일이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연등이 초여름과 함께 석가탄신일을 알려준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시대 유명한 승려 사명대사의 가사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1979년에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의 금란가사와 장삼은 사명대사가 나라를 구한 공을 인정받아 선조가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가사는 승려들이 입는 법의(法衣)인데, 장삼을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에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던 옷이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부터 금란가사는 원래의 색을 잃고 가사의 한 가운데가 완전히 두 동강으로 분리되어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원래 가사(袈裟)는 누더기 옷의 칙칙한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카사야(Kasaya)를 음차하여 가사라고 일컫는다. 카사야는 부정색(不正色), 괴색(壞色)이라는 뜻으로 색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가사는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화폐가치가 없는)’ 낡은 색의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세로의 한 줄을 조(條)라고 부르며 승려의 품계에 따라 9, 11, 13, 15, 17, 19, 21, 23, 25조 등이 있다.


  또한 가사는 바람구멍, 부처가 다니는 길이라고 하는 통문(通門)을 둔다. 앞에서 보면 빠진 데 없이 바느질하였는데, 뒷면을 보면 1㎝ 미만의 바느질하지 않은 구멍이 숨어있다. 살짝 들쳐보아야만 알 수 있다. 한쪽 통문에 콩알을 넣어 사방으로 굴려 가사의 모든 통문을 지날 수 있도록 막힘이 없어야 한다. 25조 가사의 경우 많게는 통문은 332개나 된다.


  사명대사의 금란가사는 최상급인 25조 홑가사이며, 퇴색하여 일부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귀한 홍색으로 염색한 여덟 가지 보배로운 문양의 비단(八寶紋緞)으로 만들었다. 크기만 해도 가로 270㎝, 세로 83㎝이다. 1984년에 습식클리닝 등 보존처리를 한 적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고 헤진 부분이 많아 30㎝ 남짓한 작은 유물상자에서 꺼내기조차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조각으로 분리된 사명대사의 금란가사를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리기 위한 보존처리가 필요했다.


  2014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기본적인 세척 등의 보존처리를 마치고, 분리된 주폭(主幅)을 이어 형태를 복원하였다. 가사의 형태 복원만 대략 수개월이 걸렸으며, 유물의 바느질법 그대로 진행되었다. 유물의 구성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조각을 잇거나 통문을 두기 위해 철저한 계산과 꼼꼼한 바느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문은 바느질 하지 않고 가장자리(襴)는 무려 7땀 상침을 둘렀다. 사명대사의 금란가사는 보강천(유물을 지지해주는 받침 직물) 위에 얹혀 헤진 부분을 고정시켰으며, 결실된 부분은 원래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도록 보존처리 완료하였다. 가사의 밑받침 옷인 장삼(長衫) 역시 깃의 한가운데가 없는 상태였다. 세척 후에 깃과 양쪽 무를 복원하였다. 사명대사 장삼은 염색하지 않은 면직물로 만들어 졌다.


  유물은 보존처리 완료 후 원 소장처인 밀양 표충사로 인계되었다. 올해는 특별전 계획이 없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는 못하였지만, 돌아오는 석가탄신일에는 전시소식이 있기를 기다려본다. 불자는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사의 한 조각 한 조각에 담긴 정성과 고행, 무소유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