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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표충사(表忠祠)

노촌魯村 2011. 12. 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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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表忠寺)의 표충사(表忠祠) 영역

사당영역은 사명대사.서산대사.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시고있는 표충사(表忠祠) 좌우에 표충서원과 유물관이 있다.

표충사(表忠祠)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기허대사

본관 : 밀양
속성 : 박(朴)
속명 : 영규(靈圭)
법호 : 기허당(騎虛堂)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豊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
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서산대사 휴정 [休靜, 1520-1604.1.23]
본관 :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
속성 : 최(崔)
자 : 현응(玄應)
법호 : 청허(淸虛), 서산(西山)
아명 : 여신(汝信)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하여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지만
1594년(선조27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표충사(表忠 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담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표충서원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절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37년)에 사명대사가 강화사절로 일본에 갈 때 그 호송문제와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포로의 송환문제를 다툰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을 새긴목판, 서산대사의 사적을 새긴 목판, 다라니경목판, 금강반야바라밀경, 불설아미타경 등과 같은 불경등이 포함되어있다. 특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과 그 이후 강화사절로서 사명당의 역할을 살필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밀양표충사소장유품 (密陽表忠寺所藏遺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3호)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나라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는 절이다. 이 사당을 당시 서원처럼 보아 표충서원이라 했는데, 사찰에서 관리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때 폐허가 됐던 것을 숙종 40년(1714)에 다시 세우면서,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 절의 유품 전시관에는 선조 38년(1604) 일본에 갔다오면서 선물로 받은, 대형 목탁과 북을 포함하여 200여점의 전시물이 있는데, 대부분 사명대사가 사용하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表忠寺 靑銅銀入絲香垸.국보 제75호.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31-2 표충사)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화재청 자료)

 

사명대사의금란가사와장삼 (泗溟大師의錦란袈裟와長衫.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

조선시대의 유명한 승려 사명대사(1544∼1610)가 입던 가사와 장삼으로, 사명대사는 나이 16세 때 승려가 되어, 임진왜란(1592) 때에는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가사란 승려들이 입던 법의로, 장삼을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던 옷이다. 그의 유물 가운데 금란가사는 황금색의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가로 270cm, 세로 80cm이다. 지금은 색이 담황색으로 변색되고 훼손도 심하여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장삼이란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만든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승려의 옷을 말하는데, 이 옷은 흰색의 무명으로 만들었다.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으며, 군데 군데 훼손은 되었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길이 144cm, 품 55cm이고, 등솔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43cm이며, 짧은 고름이 달려 있다. 이 유물들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승려들의 옷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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