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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대비사(大悲寺)

노촌魯村 2011. 12. 2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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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대비사(大韓佛敎曹溪宗 大悲寺.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길 590)

이곳 사찰은 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한 신승이 호거산(虎踞山)에 들어와 3년 동안 수도 후 560년(眞興王 21년)부터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동안 5갑사(大鵲岬寺, 嘉瑟岬寺, 小鵲岬寺, 天門岬寺, 所寶岬寺)를 완성하였는데, 중앙의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또는 대비갑사(大悲岬寺)라고 한 5갑사 중의 하나로 600년(眞平王 22년) 원광국사(圓光國師,542∼640년)가 중창하였다. 이 사원의 이름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한다. 당초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던 것을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고 입구에 줄지어서 있는 11기의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부도가 이곳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전형적인 다포식 맞배 건축물인 대웅전은 보물 제8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각 불단에서 묵서가 발견되어 조선 숙종 11년(1685년)에 중건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박곡리에 보물 제20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석가여래좌상(石迦如來坐像)은 석굴암 불상과 같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불상(佛像)중 걸작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 대비사의 "꽝철이" 전설에는 어느 해 가뭄이 들어 곡식이 시들고 있는데 상좌가 가꾸는 밭의 채소는 싱싱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지는 자정이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상좌를 지켜보니 밭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있기에 어느 날 그 뒤를 몰래 따라 가보니 용으로 화하고 있어 놀란 주지는 인기척을 내고 말았다. 용은 그 날이 하늘로 승천하는 날이었는데 주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꽝철이로 변하고 말았다. 분함을 감추지 못한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괴암들을 깨뜨려 주변에는 솟은 바위가 없어 졌고, 이때부터 꽝철이를 쫓기 위해 비가 오지 않으면 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청도군청)


 

 

 

대비사 대웅전(大悲寺 大雄殿.보물 제834호.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길 590)

운문산 서쪽에 위치하는 대비사는 557년(新羅 眞興王18년)에 신승이 호거산(虎踞山)에 들어와 3년후인 560년(신라 진흥왕 21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걸려 5갑사를 대작갑사(현 雲門寺)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웠는데,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또는 대비갑사(大悲岬寺)라고 한 다섯갑사 중의 하나로 신라 진평왕 22년(600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중창한 사찰이다. 이 대웅전은 16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춘 건물로 전체구성은 짜임세가 있고 공포도 건실하게 짜여있다. 불단내부에 조선 숙종11년(1685)에 대웅전의 불탁을 수장하고 이듬해 법당을 단청하였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이 기록을 근거로 이 건물의 중건 년도를 숙종(1674년∼1720년)년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후불정(後佛幀)은 1695년(康熙34년)에 제작된 것으로 건축시기는 불정 보다 앞서 건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깔고 상부에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고 그 위에 다포(多包)를 구성하고 기둥사이에 각각2개의 공간포 간격이 정연하며 천장은 우물 천장이다. 정면3칸, 측면3칸의 규모로 전면의 길이가 34측(10.2m) 측면의 길이가 24측(8.6m)인 전형적인 다포계 맞배지붕이고 공포는 내3출, 외2출목으로 조선중기 다포계 맞배집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둥은 모두 민 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상승감을 위하여 모서리 귀둥을 조금 높이는 귀 솟음 기법과 안정감을 위한 안 쏠림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여러번 중수되었으나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다. 단청(丹靑)이 퇴색하여 백골이 드러나있으나 사찰건축 연구에 중요한 전각이다. 이 사찰은 당초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사원의 명칭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붙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찰 입구의 많은 부도가 고승 대덕 분들이 주석(主席) 하였음을 알 수 있다.(청도군청 자료에서)


대웅전 계단 소맷돌

  


 

    

   

  

   

 

   

   

  

  

   

 

 

 

 대비사 대웅전 풍경

삼성각에서 본 대웅전

대비사 삼성각

  대비사 삼성각의 산신.칠성탱화.나반존자

 천진보탑(天眞寶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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