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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선암서원(仙巖書院)

노촌魯村 2011. 12. 2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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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서원(仙巖書院.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경북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55-27)

이 서원은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仙巖)에 자리잡고 있다.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享祀)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초창은 선조1년(1568년) 매전면 운수정(雲樹亭)에 두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여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이곳은 1577년(선조10)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사우(祠宇)와 위패(位牌)를 옮겨 선암서원이라 개칭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고종15년(1878) 소요당(逍遙堂) 선생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침은 정면5칸 측면1칸으로 우에서 좌로 부엌, 방,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은 정면4칸, 측면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내.외 되어있고 방2칸, 대청2칸의 단순한 평면인데 특히 가구와 헌부(軒部) 구성에 주목할 기법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는 선자(扇字)가 걸린 귀보다 중앙부분이 튀어나오도록 긴 서가래를 걸었고 대청에 보는 3량 가로 걸작이다. 평면구성은 안채, 득월정(得月亭), 행량채, 대문채가 자를 이루고 그 뒤편으로 북향한 선암서당(仙巖書堂)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가운데3칸을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에 방을 두었고 포작은 외1출 내3출목을 조직하였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과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海東續小學板木) .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청도군청 자료)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은 정면4칸, 측면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내.외 되어있고 방2칸, 대청2칸의 단순한 평면인데 특히 가구와 헌부(軒部) 구성에 주목할 기법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는 선자(扇字)가 걸린 귀보다 중앙부분이 튀어나오도록 긴 서가래를 걸었고 대청에 보는 3량 가로 걸작이다.

 

 

북향한 선암서당(仙巖書堂)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가운데3칸을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에 방을 두었고 포작은 외1출 내3출목을 조직하였다.

    

    

 선암서당 현판

 소요당 현판

 

 

 

 

 

 독특한 천장 구조

 

 

 

 

 

 

 

 

    

 선암서당 뒷면

 

 장판각

 

 

해동속소학판목 (海東續小學板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82)

이 판목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진계 박재형 선생이 고종 21년(1884)에 간행한 것으로, 128매가 있다. 구성을 보면 우리나라 선인들의 격언과 언행을 내외편으로 분류하여 내편은 입교로 가르치는 도리를 세운 내용 21장, 명륜으로 인륜을 밝힌 내용 43장, 교신으로 몸가짐을 삼가라는 내용 35장, 계고로서 옛일을 공부하여 고찰하는 내용 6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편은 가언으로 아름다운 말들을 담은 내용 74장, 선행사열 등 174장이 실려 있다. 이들 내용은 생활 속에서 실천을 교육목표로 한 입문교과서라 할 수 있다. 당시 모화사상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시기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 선비가 찾아내어 쓰고, 또한 교과서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자료)

    

 

십사의사록판목 (十四義士錄板木.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 )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 문중의 14명이 의병운동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던 일들을 기록하여 새긴 목판이다. 206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1매에 20행 18자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간행에 있어 기초로 삼은 것은 정조 18년(1794) 혹은 21년(1797)에 간행된『충효록』이나, 후손 박정상이 지은『박씨충효록』이다. 하지만 이들 자료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200여년이 지난 후의 사실이라 그 자료적 가치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사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 당시의 지역전투상황과 전쟁극복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 서술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문화재청 자료) 

 

     

 

배자예부운략 목판 (排字禮部韻略 木板.보물 제917호.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시나 운문을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초사전이다.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이 참고하기 쉽도록 만들어졌으며, 과거를 맡아보던 부서인 예부(禮部)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송대, 원대로부터 내려오던 책을 우리나라가 수입해 와서 사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동국정운』등 비슷한 성격의 책이 만들어졌으나, 여전히 이 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판목은 서(序:머리말), 본문, 옥편, 발(跋:맺음말) 등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46.2㎝, 세로 20.5㎝, 두께 1.8㎝이다. 수량은 162매이며, 숙종 5년(1679) 박동부가 조판한 것이다. 다른 본들은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 책의 판목이 유일하게 한 장도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매우 다행하면서도 신기한 일이다. (문화재청 자료)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仙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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