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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포항 중성리 신라비 (浦項 中城里 新羅碑)

노촌魯村 2012. 2. 26. 19:10

 

포항 중성리 신라비 (浦項 中城里 新羅碑.보물 제1758호.등록지정일 2012.2.2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포항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이 비는 신라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이 비의 발견 장소가 냉수리신라비 발견 장소로부터 8.7㎞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 데다, 비문의 내용 또한 유사점이 많다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성이 있고, 그리고 관직명과 관등 표기의 유사성 및 냉수리신라비에 나타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되는 인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ㆍ확정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이 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그 연대가 가장 앞선 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신라의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우선 문장 기술이 능숙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점으로 보아 당시 신라에서는 중국의 한문(漢文)이 크게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비문의 서체로 보아 중국의 한(漢)나라 또는 위진(魏晉)시대 서예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이 비의 서체를 굳이 중국의 서예 발전의 과정 상에서 비추어 본다면, 소전(小篆)으로부터 예서(隸書)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 상의 고예(古隸)에 비견해 보거나, 상하 장방형(長方形)의 소전체로부터 좌우 편방형(偏旁形)의 예서체로의 이행 과정 상에서 잠시 나타났던 파책(波?)이 없는 고예체에 비견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중국의 서체와 서풍에 별로 영향받지 않은, 신라의 자생적, 토속적 서체ㆍ서풍이라 하겠다. 글자의 결구가 불균형의 조화를 이루면서,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익살로 넉넉한 여유로움의 자유를 구현하는 무정형(無定形)적 서예미학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어느 서체ㆍ서풍만을 고집하지 않고 전법(篆法)ㆍ예법(隸法)ㆍ해법(楷法)은 물론 행법(行法)까지도 두루 섭취ㆍ융합하여 불균형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신라적 자생서예라고 하겠다. 이 비는 통일신라 이전 신라시대의 심미의식과 초기 신라 서예사를 밝히는 데 획기적 자료이다. 또한 이 비는 통일신라 이전의 역사와 문화 예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도로공사 도중 발견, 신고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포항 중성리는 1989년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신라비’(국보 제264호)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8.7㎞ 떨어져 있다. 이 비는 부정형의 자연석 화강암(최대높이 104㎝, 최대폭 49㎝, 두께 12~13㎝, 무게 115kg)에 한 면에만 음각으로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는 전체 12행으로, 한 행에는 많으면 20자 정도로 모두 203자 정도가 확인되고 있고 하단부에 약 20㎝ 정도 글자를 새기지 않은 여유 공간이 있을 뿐, 윗부분은 비의 윤곽을 따라 최상단부까지 글자가 가득 새겨져 있다. 비의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글자 대부분이 판독 가능한 양호한 상태이다.


국립경주박물관(재현품) 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