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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 (茶山 丁若鏞 先生 事蹟碑)

노촌魯村 2012. 5. 1. 10:03

 

 

선생의 자(字)는 미용(美庸), 호(號)는 다산(茶山), 본관(本貫)은 나주(羅州)로 조선 영조(英祖) 38년(1762)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부(父)는 진주목사를 지낸 재원(載遠)이며 모(母)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고산 윤 선도(孤山 尹善道)의 6세손이자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이다. 선생은 15 세 때에 풍천홍씨(豊川洪氏)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헌종(憲宗)2 년(1836) 2월 22일에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實學)의 집대성자이자 정의(正義)를 실천한 사상가이며 행정가이다. 22세에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고, 2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함으로 서 호학군주(好學君主)인 정조대왕(正祖大王)에게 발탁되어 군왕(君王)의 측근 문신(文臣)으로 애민지정(愛民之政)을 실천하게 된다. 일찍부터 학문의 실용성과> 현실 참여를 중시하는 실학(先學)의 학풍을 숭상하여 배우고 익혀온 선생은 서 학(西學)의 수용(受容)에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승하후 붕당질서에 기인하여 일게 된 서학(西學)관련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년 대옥사로 선생의 형인 약종(若鐘)은 참형에, 약전(若銓)은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선생 은 이곳 경상도 장기고을 마현(馬峴)으로 각각 유배되는 참화를 입게 되니, 선생 의 마현(馬峴)땅 도착이 신유년(辛酉年. 1801년) 삼월 초아흐레이다. 마현방 성선봉(馬峴坊 成善封)의 집을 배소(配所)로 하여 유배의 삶을 해가던 선생은 장형 약현(長兄 若鉉)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이 작성한 백서사건(帛書 事件) 관련의혹으로 시월 스무날에 서울로 압송된다. 그사이 이백 이십여일간을 장기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牧民行 態)를 글로써 남기게 되었으니, 아래에 적은 장기농가십장(農歌十章)과 기성잡 시이십칠수.아가사.해랑행.오적어행.타맥행등(?城雜時二十七首.兒哥詞.海狼行. 烏賊魚行.打麥行) 백삼십여수의 시작(時作)이 그렇게 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 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일 수가 없다. 그밖에도 이아술. 기해방례변(爾雅述. 己亥邦禮辨) 등의 서책도 저술하였으나 유실되어 없어졌다. 의금부에서의 추국(推鞫)을 마친 다음 선생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 配)되어 순조(純祖)18년(1818년) 9월2일의 해배시(解配時)까지 17년여 긴 세월을 학문연구에 헌신한다. 선생이 일생동안 남긴 오백여편의 저술(著述)과 이천여 수의 시작(時作)은 현실참여와 유배의 만고를 감내하며 온양해낸 애민(愛民)과 선의지(善意志)의 결정(結晶)이 된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낼 사상가(思想家)로서, 바름을 실천한 표상적 지식인( 表象的 知識人)으로서, 참여와 서정(抒精)을 적절히 묘합(妙合)해 낸 비판적 문 학가(批判的 文學家)로서, 정성 다해 살다간 선생의 혼백이 우리고을 장기에 남아 후세를 경계(警戒)하니 장기고을 예민(裔民)들이 인의(仁義)와 예지신(禮智 信)을 어찌 외면 하오리오. 선생이 떠나신지 이백년이 되는 해에 장기고을 사 람들이 흠모의 뜻을 모아 이 비(碑)를 세우니, 선생의 숭고한 정신 더욱 깊이 활착(活着)하여 부디 온 강토에 널리 만영(滿盈)하옵소서.
辛巳年(2001) 十一月十日 (신사년(2001) 십일월십일)

李種吉(이종길) 삼가 지음
韓永久(한영구) 삼가 씀

자료출처 : 포항시 장기면사무소 자료

 

麥嶺琦嶇以太行(맥령기구이태행)

보릿고개 넘기기가 태산처럼 기구터니
天中過後始登場(천중과후시등장)

단오를 지나면서 비로소 여묾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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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님 맛보라고 어느 누가 나누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