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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난고(蘭皐) 김삿갓 문학관

노촌魯村 2012. 4. 29. 16:09

 

난고 김병연은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사선생의 후예, 휴암공파계 제24대 손이다.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成深), 호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다. 선생은 5세때 선친 부사인 조부 익순이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조모 전주 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으며,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갔다. 선생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모친은 아기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후일에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모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친은 홧병으로 죽었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선생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모르고 자랐으며, 20세때 한살 연상인 장수 황씨와 결혼하였다. 그 해 영월 동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시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에 대하여 가산 군수 정씨를 예찬하고 선천 부사이자 방어사이던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지어 장원을 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22세때 아들 학균을 낳은 뒤 상경하여 이름으르 김란, 자를 이명, 호를 지상으로 바꾸고 안응수의 문객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권문에 기대어 출세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귀가하여 형 병하에게 아들 학균을 입양시키고 그해 차남 익균을 얻었지만 처자식을 남겨둔채 방랑길에 올랐다. 그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생은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각지를 방랑하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양반들의 잘못 된 생활상을 시로 옮겻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에서는 훈장으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차남 익균이 여러번 찾아와 귀가하자는 간청을 끝내 물리치고 방랑하다 54세 때에는 전라도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에서 쓰러졌는데,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간병하여 그곳에서 반년 가까이 지냈으며, 이후 지리산 등을 방랑하다 3년만에 쇠약한 몸으로 선비의 집에 다시 돌아와 1863년(철종14년) 3월 29일(57세) 별세하여 마을 동편 산록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3년후에 차남 익균이 지금의 묘인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응수(李應洙)에 의해 김립시집(金笠詩集)이 간행되었고, 묘역 주변에는 김삿갓의 문학과 사상을 기리기위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과 이응수선생 공적비가 있다.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영월군청 자료)

 

 

 

 

 

 

 

 

 

 

 

 

 

 

 

 

 

 

 

 

 

 

 

 

 

 

 

 

 

 

 

 

 

 

 

 

 

 

 

 

 

 

 

 

 

 

 

 

 

 

 

 

 

 

 

 

 

 

 

 

 

 

 

 

 

 

난고(蘭皐) 김삿갓 문학관 바로가기 ; http://www.ywmuseum.com

 

방랑시인 김삿갓 비애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