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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육사(陸史) 시비(詩碑).(안동시 성곡동 안동민속촌)

노촌魯村 2012. 6. 3. 13:16

 

 

 

 

 

 

이육사(李陸史) : 1904. 4. 4 경북 안동~ 1944. 1. 16 중국 베이징[北京]. 시인·독립운동가.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본관은 진보(眞寶).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台卿).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DAUM백과사전)

광  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