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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 (瑩源寺址寶鑑國師妙應塔碑)

노촌魯村 2012. 6. 20. 04:09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 (瑩源寺址寶鑑國師妙應塔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경남 밀양시 활성동)

 영원사터에 남아 있는 보감국사의 탑비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재를 수습해 놓은 것이다. 보감국사(1251∼1322)는 고려 일연스님의 제자로, 충렬왕 때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충숙왕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몇년 후 은퇴하여 영원사에 머무르다가 말년에 송림사로 옮겨 입적하였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보감’은 그의 시호이며, 탑이름은 ‘묘응’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을 받치고 있다. 거북의 머리는 힘찬 형태로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가득 새겨 두었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변에는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다. 凸자 모양의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원형의 공간을 두어 비이름을 새겨두었다. 『밀양읍지』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이제현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

보감국사(寶鑑國師)는 고려 말기 충숙왕(忠肅王)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낸 고승(高僧) 혼구(混丘 : 1251-1322)의 시호(諡號)인데,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조계종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명병서(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寺碑銘竝書)"라는 비문(碑文)을 지었고 이때 세운 비석(碑石)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밀주구지(密州舊誌) 등에도 "비상입기지(碑尙立基地)"라고 적고 있어서 이곳에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밀주승람(密州勝覽)에서도 "영원사재자씨산하고려이제현사승보감비명비석상재(瑩源寺在慈氏山下高麗李齊賢사僧寶鑑碑銘碑石尙在)"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봐서 훼손(毁損) 하기 전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유실(遺失)되어 완형의 비석을 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지대석(地帶石)도 없이 다만 비석의 일부(一部)인 이수(이首)와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의 중앙에는 비신(碑身)을 박은 장방형(長方形)의 홈이 있고 그 둘레에 구름문양(雲文)을 새겼으며 등허리에는 귀갑문(龜甲文)이 정연하다. 귀두(龜頭)의 목은 바로선(直立) 자세이고 입을 벌린 괴수(怪獸)의 형태인데 조각은 비교적 섬세하다. 이수는 원상(圓狀)의 삼각형으로 앞뒤에 두 마리씩의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고려시대 탑비(塔碑)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밀양시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