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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안동한지공장 견학

노촌魯村 2013. 1. 16. 18:18

 

 

 

 

 

한지로 만든 수의(두루마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과정

① 닥채취 : 닥나무는 매년 10월에서 이듬해 3월사이에 채취한다.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 : 뽕나무과(―科 Mor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 키는 3m 정도 자란다. 잎은 어긋나고 흔히 2~3갈래로 나누어지며 가장자리에는 잔톱니와 가시가 있고, 잎 양쪽에 가는 가시가 달린다. 꽃은 잎이 나올 때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따로따로 무리 지어 핀다. 수꽃은 새로 나온 가지의 아래쪽 잎겨드랑이에서 피며 암꽃은 위쪽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열매는 둥그렇고 6월에 붉은색으로 익으며 겉에는 아주 작은 가시들이 달려 있다.
② 닥무지 : 베어낸 생닥나무를 닥솥에 재여 비닐커버로 밀봉하고, 수증기에 6~7시간 쪄낸다.
③ 백닥만들기 : 건조한 흑피를 물에 하루정도 담가서 표피를 벗기기 좋게 하여 칼판위에 흑피를 놓고 닥칼로 껍질을 벗겨내어 하얀 백닥을 만든다.

 

 

④ 백닥삶기 : 물에 불린 백닥을 약 30cm길이로 잘라 천연 잿물을 넣은 닥솥에 약 2시간 정도 삶는다.

닥풀


⑤ 곤죽만들기 : 깨끗이 티를 골라낸 닥을 널따란 닥돌위에 올려놓고 닥 방망이로 2~4시간 동안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들겨 해섬하여 죽같이 만든다.

⑥ 종이뜨기 : 닥죽을 지통에 물과함께 넣고 대 막대로 200번정도 세게 저어준 다음 닥풀을 섞어서 휘젓고 대로 만든 발로 '물질'을 하여 지액에서 종이를 떼낸다.

 

 

⑦ 물빼기 : 물빼기는 넓고 판판한 판에 떠낸 종이 400~500장 정도를 쌓고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서서히 물을 빼낸다.

⑧ 건조기에 말리기 : 수분을 뺀 종이를 또다시 한장한장 벗겨서 흙벽같은데 붙여서 말리면 종이가 된다.

 

 

 


⑨ 도침질하기 :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평활도를 향상시키며 광택을 내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놓고 다듬이질을 한다.

(도침하다 : (사람 피륙이나 종이)다듬잇돌 다듬어서 반드럽게 하다.)

의궤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도침(搗砧)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조선왕실문화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조선왕조 의궤(儀軌). ‘의궤는 의식절차를 마차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매뉴얼을 일컬어 의궤라고 불렀다.

조선왕조 의궤가 흥미로운 점은 행사준비 과정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 날짜순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 외에, 오늘날 사라진 물품 제작공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돗자리, 방석, 썰매 등 소소한 물품의 제작과정을 살피다 보면 도침이라는 용어에 눈길이 멈춘다. 도침은 두드린다는 의미의 ()’자와 다듬잇돌을 뜻하는 ()’자가 합쳐진 말로 닥종이를 두드려 섬유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표면을 편평하게 만들어 종이가 질기고 보존성이 좋게 만드는 가공법을 일컫는다.

한 가지 왕실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이가 필요했다. 조정의 논의를 받아쓸 종이, 관청끼리 주고받을 문서, 장인이 설계하거나 도안을 그릴 종이, 의궤 제작에 사용할 종이 등...경국대전에 기록된 종이의 종류가 수십 종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종이의 쓰임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학자 서명응의 설명에 따르면 도침은 백여장 단위로 종이를 포개 앞뒤로 수백 번씩 돌로 두드려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왕실에서는 도침을 장인이 아닌 죄수들에게 맡겼다.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관청)에서 도침할 장소를 마련하면 죄수들이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종이를 두드렸다. 이들에게는 하루에 한 끼만 제공되었기 때문에 허기진 것은 다반사였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장소에서 수백, 수천장의 종이를 두드리다 보면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곧 도침은 조선시대 죄인을 다스리기 위한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행여 신분이 낮은 사람이 도침에 동원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조선초기에는 관료와 내시, 심지어 왕의 혈족인 종친도 잘못을 저지르면 도침장에 끌려나와 종이를 두드리며 참회하도록 하였다. 도침이 끝난 종이는 조지서의 관원과 숙련된 책장(冊匠)이 이상이 없는지를 철저하게 검사하였다.

이렇듯 조선백성들이 흘린 눈물과 땀은 의궤 속 종이가 오늘날까지 변색되지 않고 견고하게 버티게 된 힘이 되었다. 의궤를 숭고한 예술품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이유다.  

안동한지 탐방

안동 한지

옛지와 어울 빛의 안동시민 축제 한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