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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求禮 華嚴寺 覺皇殿)

노촌魯村 2013. 11. 24. 05:07

 

구례 화엄사 각황전(求禮 華嚴寺 覺皇殿.국보  제67호.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각황전 주련(覺皇殿 柱聯)

偉論雄經罔不通
一生弘護有深功
三千義學分燈後
圓敎宗風滿海東

위대한 경전과 논서 모두 통달하시고
일생을 홍포하사 공덕 깊고 넓도다.
걸출한 삼천 제자 법등을 나누시니
화엄의 종풍 전국을 휩쓸었네.

西來一燭傳三世
南國千年闡五宗
遊償此增淸淨債
白雲回首與誰同

인도에서 온 일촉의 등불 온 세상 밝히니
천년을 전하여 다섯 갈래로 피어났도다.
이 많은 청정한 빗 노닐며 갚으려하니
백운에 머리 돌려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구례화엄사화엄석경(求禮華嚴寺華嚴石經.보물  제1040호.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황전리)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각황전 중건 이야기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 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승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力)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 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허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 오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을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 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룰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번 절한 뒤 소(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쥐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조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줘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출처:화엄사)

 

어느날밤 白衣老人이 現夢하여 이르기를 손을 물속에 넣어서 물이 묻지않는 스님으로 하여금 化主로 選定하고 化主하려나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化主冊을 맡기도록하라 하였다. 다음날 大衆을 모아놓고 모두 물속에 손을 넣게하였으니 大衆스님들중에 오직 한 老스님만이 물이 묻지않았다. 化主冊을 받은 老스님은 하는 수없이 化主次 洞口밖을 나가다가 나물캐는 한 老婆를 만나 化主冊을 던져주었다. 화주책과 現夢이야기를 전해받은 老婆는 또한 어찌할 方法없어 제가 죽어 王宮에 태어나서 華嚴寺丈六殿을 重建할수 있도록 해주십사라는 發願을 한후 곁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말았다. 그는 死後願生으로 肅宗의 妃 仁敬王后金氏夫人의 둘째딸로 태어났으나 이름모를 病에 걸려 百藥이 無効였다.  
어느날 肅宗이 꿈을 꾸니 公主의 命이 다하였으니 王은 지체없이 華嚴寺의 丈六殿을 復元하라 그 功德으로 公主는 반드시 忉利天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記別하였다. 王은 十萬兩의 內帑金을 하사하였고 英祖의 母親이며 肅宗의 後宮인 淑嬪崔氏도 同參하여 一七0二年 二層七十칸의 大法堂이 竣工되었다. 延礽君(英祖)의 願堂을 삼고 三尊佛像과 四大菩薩像을 造成奉安하고는 七日間慶讚法會를 열어 丈六殿落成을 告하고 肅宗이 覺皇殿이라 改稱하고 刑曹參判李震休에게 쓰게하여 扁額을 下賜하는 한편禮曹에서는 禪敎兩宗大伽藍으로 昇格시켰다 . 中興된 大伽藍에서는 一七0六年二月에는 明谷堂玄眼이 禪敎를 講說하였고 같은해 七月에는 雪岩堂秋鵬이 華嚴經을 宣說하였다.(출처:화엄사의 화엄사사적비문 중에서) 

각황전 옛 사진(일제시대)

각황전 내부 옛 사진(일제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