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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용강서원충열사 및 14의사묘정비(龍岡書院忠烈祠 및 14義士廟庭碑)

노촌魯村 2014. 7. 3. 23:02

 용강서원충열사(龍岡書院忠烈祠)

강서원충열사 및 14의사묘정비(龍岡書院忠烈祠및14義士廟庭碑.경상북도 기념물 제129호.경북 청도군 이서면 모산길 45-4 (학산리) )

고려 때 문신으로 청도에 터전을 잡아 밀양 박씨의 시조가 된 박익(1332∼1398)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14의사의 충절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열사와 14의사 묘정비가 있다.
고려 때 예부시랑, 중서령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던 박익 선생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14의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밀양·청도·경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밀양 박씨 가문의 14분으로 모두 부자, 형제, 사촌 등의 친척들이다. 이들 가운데 11분은 선무원종공신1·2·3등에 각각 봉해지고 한 분은 병자호란 때 1등공신이 되었는데,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14의사 묘정비는 고종 13년(1876)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두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취한 밀양 박씨의 위국충절은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문화재청)

 

 

 

 

  

   

 

 

 

 

 

 

 

 

14의사묘정비(14義士廟庭碑)

14의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밀양·청도·경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한 밀양 박씨 가문의 14분으로 모두 부자, 형제, 사촌 등의 친척들이다. 이들 가운데 11분은 선무원종공신1·2·3등에 각각 봉해지고 한 분은 병자호란 때 1등공신이 되었는데,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14의사 묘정비는 고종 13년(1876)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두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취한 밀양 박씨의 위국충절은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문화재청)

 

고려의 명신 송은(松隱) 박익(朴翊)

 

박익 ( 朴翊, 1332-1398)은 두문동 72현이었다.

고려 말에 동경판관(東京判官)·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벼슬을 지냈다. 1385년 ~ 1392년 사이에 상장(上將)으로 아장(亞將) 강희중(姜淮中)과 함께 남으로는 왜구를 토벌하고 북으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공이 컸다.

그 후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모든 직에서 물러났다.

밀양 송계 출신인 송은 박익(字,太始)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고향인 밀양 삽포리 송계마을로 귀향 하셨습니다.

역성혁면을 일으킨 이성계는 고려의 선비들이 자기한테 와서 같이 정치 하기를 당연히 원하였지요.그래서 이성계는 송은선생을 다섯번을 불렀습니다.그러나 송은선생은 꿈쩍을 하지 않으니 4번째 예관으로 보낸 사람이 바로 양촌 권근 이었습니다.

권근 선생이 국가적예의를 다하여 송은선생에게 사폐의 은전을 전달하자, 갑자기 송은선생은 안맹이롱을 하면서 손글씨로 "나는 이씨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또한 사폐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같은 것이니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 하였습니다.

이것은 곳 가문의 멸문지화를 자초하는 행동이었습니다.고려충신으로서 충절과 절개를 지키겠다는 송은선생의 마지막 절규 인것입니다.그래서 예관 양촌선생은 정이 그러시면 자식들이라도 조선에 관직을 제수시키도록 한 태조의 성은을 전하자, 송은선생께서 말씀하시길

큰아들, 우당(憂堂) 박융은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일과 근심거리만 만드는 말성꾸러기 자식이니 벼슬을 주어 보았자,이씨 조선에 걱정 꺼리만 끼칠 불충한 신하가 될것이 뻔 한 자식이고,

둘째아들,인당(忍堂) 박소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돌발적인 성격과 인내심이 부족하여,언젠가는 이씨조선의 명령을 거역하는 역적이 될 수 있는 자식이고,

셋째아들,아당(啞堂) 박조는 말못하는 벙어리 임으로 벙어리를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주면 나라님이 백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것이 뻔한 자식이고,

네째아들,졸당(拙堂) 박총은 모든일을 처리하는 것이 졸렬하고 한심스러운 자식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나의 자식들에게 벼슬을 내려주면 백성들에게 웃음꺼리가 될것이 염려스럽고 태조 이성계는 조선에 알맞은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것이 올바른 이치라고 근유하고,자식들의 벼슬마저도 사양하고 죽기만을 고변하고 애걸 하더라고 예관 양촌선생이 이태조에게 전달하니,이태조는 송은선생의 고려에 대한 충성과 강한절개에 감명을 받아 말하기를"그러고 보니,그는 나에게는 역적이지만 고려에는 충신이 아닌가. 고려의 늙은 신하로서 어찌 그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모두가 나의 잘못이지 않은가 하고 고려에 대한 충의로 생각하고 더 이상 논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1398년11월27일 운명하셨는 데 운명하시기 전날 네아들과 며느리를 불러놓고 유서 하시기를"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세 조정을 두루 섬겼으니,하늘의 은혜가 한이 없고,신운도 매우 좋았다.너희들에게 문장이 있으니,가히 음덕을 심을 만하고,또한 너희들에게는 자식들이 진진하니,집안이 번창할 것이다.

그 밖에 무엇을 바라겠는가.나는 왕씨의 혼령을 따라가지만,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게 되었다.

기히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충성을 한다면 힘껏 하여라.선천과 후천이라,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시대가 달라졌다.사랑하는 나의 네 며느리들,한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였으니,어찌 불영이,이와같은 복을 누렸단 말인가.하고 운명하셨습니다.

송은선생의 유서가 조정에 전달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벼슬의 증직이 내려지고,다음해 정종1년(1399년)에 정종임금께서 선생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모든백성들은 송은박익 선생의 행실을 진심으로 받들고 본받아 충심을 다하고 공경하라고,명하고 후손들의 귀감이 되도록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사시 하였다.밀양 고법리 무덤 고려벽화의 주인공이 바로 송은 충숙공 박익 선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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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익 벽화묘 (密陽 朴翊 壁畵墓)

밀양 박익 벽화묘(密陽 朴翊 壁畵墓.사적  제459호.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134번지 내)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의 밀성박씨 묘역의 능선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으로서, 봉분은 가로 6m, 세로 4.8m, 높이 2.3m이며, 내부 석실(길이 .5m, 폭 1m, 높이 0.8m)의 사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묘의 축조수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를 갖춘 방형묘라는 점이다. 방형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 계층에서 유행한 묘제 중 하나이나,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이 경사지게 설치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조선전기의 횡구식 석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와 구(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대한 검토 자료가 된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검정선으로 벽화내용을 소묘한 뒤 마르기 전에 주요부위를 적·남·흑색으로 채색하는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퇴락되어 있으나 잔존부분에는 인물, 말, 도구 등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1332∼1398)의 휘는 익(翊),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밀성으로 고려말의 문신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世子貳傅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이 되는 등 고려말 팔은(八隱)중 한 분으로,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벽화 발견에 의한 조선초 생활 풍습의 연구 등 고고학적 또는 회화사적 가치 외에 지석(誌石)의 출토로 고려말 문신인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0년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문화재청)

남동장벽 벽화

내부벽화(부분1)

내부벽화(부분2)

북서장벽 벽화

내부벽화(부분3)

남서단벽 벽화

내부벽화(부분4)

묘지석

출토유물(화문석)

출토유물(동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