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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청도

금호서원(琴湖書院).이운룡 선무공신교서 및 관련고문서.이운룡장군영정(李雲龍將軍影幀).식성군문적(息城君 門籍).의령 오천리 이운룡장군 묘

노촌魯村 2014. 7. 2. 06:42

  

금호서원(琴湖書院.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8호.경북 청도군 이서면 홍선리 44외 3필)  

동계 이운룡 장군과 향산 이백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운룡(1562∼1610)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이 서원은 원래 이운룡의 출생지인 매전면 온막리에 상충사를 세우면서 유래되었다. 순조 14년(1814)에 이서면 금촌리로 옮겼으나 고종 5년(184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남은 강당을 지금 있는 자리에 이전하면서 효충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947년에는 서원을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인 시덕문을 들어서면 강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강당의 뒤쪽에 내삼문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현충사가 있다.(문화재청)

 

이운룡(1562∼1610) : 자는 경명(景明),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載寧), 남해현령(南海縣令) 몽상(夢祥)의 아들이다. 선조18년(1585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22년(1589년)1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도망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하여 내원(來援)한 수군과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50여척을 격침시켜 임진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 선조29년(1596년) 이순신이 천거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선조 37년(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에 책록 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선조 38년(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管), 포도대장 겸 화기제조(捕盜大將 兼 火器提調),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다. 선조40년(1607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서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 되었다.(청도군청)

 

 

 

 

 

 

 

 

이운룡 선무공신교서 및 관련고문서(李雲龍 宣武功臣敎書 및 關聯古文書)  

이운룡 선무공신교서 및 관련고문서(李雲龍 宣武功臣敎書 및 關聯古文書.보물  제1212호.경북 청도군 이서면 금촌2길 46-3 (금촌리))  

선조가 선조 37년(1604)에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동계 이운룡(1562∼1610)에게 내린 상훈교서와 교지 등 2점이다.
이운룡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옥포만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이 도망치려는 것을 막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 50여 척을 쓰러뜨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이끌었다.
교서는 이운룡이 옥포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무공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이운룡을 선무공신 3등으로 정하고 포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의 1계급 진급과 부모 처자도 1계급씩 올리되 자식이 없을 경우 조카나 여조카까지 1계급씩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손인 큰아들이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하여 영원히 도울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교지는 선조 29년(1596) 이운룡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사령장이다.
이 교서 및 교지는 조선시대 공신 연구 및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인물연구의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문화재청)

 

 

 

 

 

이운룡장군영정(李雲龍將軍影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정1길 27 (원정2리))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운룡(1562∼1610) 장군의 초상화이다.
이운룡은 문무를 겸비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포도대장과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이 상은 선생이 선조 37년(1604)년 공신으로 봉해졌을 때 임금의 명을 받아 그린 공신상으로 보인다. 관복의 가슴에 호랑이 무늬의 흉배를 두고, 금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어 공신의 반열에 오를 당시의 벼슬이 종 2품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공신도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명대리에 상충사를 세우고 이 초상화를 보존하고 있다.(문화재청)

 

식성군문적(息城君 門籍) 

식성군문적(息城君 門籍.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637번지 이서면 흥선리 산44-3)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활약했던 이운룡(1562∼1610) 장군이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와 장계이다.
이운룡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올라 선전관, 옥포만호 등의 벼슬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앞바다에 왜구가 나타나자 적의 거대한 외형에 밀려 대적하지 않고 도망하려는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도망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배신행위라 하고,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 함께 싸워 적선 50여 척을 불태우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후 전쟁기간 내내 우리 수군이 남해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였다. 그가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도의 금호서원과 의령의 기강서원에 그 위패가 모셔졌다.
『거영일기』는 선조 38년(1605) 7월 30일부터 선조 39년(1606) 9월 1일까지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병영예식(兵營禮式), 군의 장비, 훈련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계본등록』은 선조 38년(1605) 9월 15일부터 선조 40년(1607) 6월 1일까지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왕에게 올렸던 장계 138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들은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상과 화기, 전선, 수군편제, 훈련과정 등이 총망라되어 있어 조선시대 전쟁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교지(敎旨) 1매는 가로 61.5cm, 세로 55cm의 크기로 1607년(선조40년) 3월 2일 장군이 충효장의 선무공신가선대부 식성군(宣武功臣嘉善大夫 息城君)에 책봉된 고신(告身)으로 전문 6행 33자로 되어 있으며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유서(諭書) 1매는 가로 140cm, 세로 70cm로 1605년(선조38년) 8월 21일 이운룡 장군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兼 三道統制使)로 재직 중일 때 병권을 장악한 일선 지휘관에게 출병시의 징표인 부절(符節) 33부를 내리면서 하사한 유서로서 전문 10행 116자로 되어 있으며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찍혀 있다.
상서(上書) 1매는 가로 155.2cm, 세로 256.8cm로 1758년9영조34년) 11월 경상도 안동을 비롯한 22개 지역의 유생 유량 등 408인이 연명으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인 이운룡 장군을 모시는 사묘의 창건을 소청하는 청원서이다. 이 소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경상도 각 지역의 유림들이 앞서 발의한 상서로 임진왜란사 자료 및 위인전기 자료로써 가치가 높다.(문화재청) 

 

 

 

 

의령 오천리 이운룡 장군 묘역(宜寧 梧川里 李雲龍 將軍 墓域.경상남도 기념물 제274호.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산30-1 지정면 오천리 산30-1)

이운룡(李雲龍)은 1562년 경북 청도에서 남해 현령을 지낸 이몽상의 아들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 옥포만호로서 옥포대첩에서 공을 세웠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으로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고, 동 9월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인물이다. 광해군 2년(1610년 사망한 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 묘는 본래 경북 청도에 있었으나, 20년 후인 1630년 그의 아들 평택현감 이암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재 이곳은 외손인 밀성손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그 내력은 택당 이식이 쓴 그의 묘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묘역에는 현재 이운용의 묘를 비롯하여 묘비, 상석과 향로석, 동자석 1조(2기), 망부석 1조(2기) 등 석조물이 일괄로 남아 있다. 봉분은 높이 3m 직경 6m 정도의 원분으로,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치석한 석재를 가지런히 돌렸다. 아래에 받침이 되는 돌을 돌출되게 깔고 그 위에 면석처럼 돌을 얹었다. 구릉의 높은 쪽인 뒷면에는 돌을 돌리지 않고 꼬리가 길게 돌출한 것이 특징이다. 봉분의 모습으로 보아 후대에 크게 수리하지 않은 듯한데, 둥글다기보다는 뾰족한 것처럼 처리된 것 또한 독특하다. 묘비는 받침대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없다. 비면이 마모되어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고,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이미 번역되어 있어 ‘息城君實記’에 수록되어 있어 생애와 무공을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받침에 조각된 花文은 선명하다. 동자석은 80㎝ 내외의 높이로 낮은 편이며, 양쪽이 같은 문인석의 형태이다. 얼굴을 제외한 전체 조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