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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개심사(瑞山 開心寺)

노촌魯村 2014. 8. 11. 00:30

 서산 개심사(瑞山 開心寺) 가는 길 풍경

개심사 아래에 있는 드넓은 초원. 이국적인 목장 풍경

 

 

 

 

 서산 개심사(瑞山 開心寺)

 

 

 

  

  

안양루의 현판

<해강 김규진(海崗 金奎鎭) 전서체 상왕산(象王山) 개심사(開心寺)>

 

서산 개심사 대웅전(瑞山 開心寺 大雄殿.보물  제143호.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 (신창리) )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연봉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瑞山 開心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보물  제1619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 (신창리) )

이 아미타불상은 최근(2004년) 발견된 복장물 <아미타불상중수 봉함판>의 수보묵서명(修補墨書銘)에 의해 고려 충렬왕 6년(1280) 불사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승재색(僧齋色)의 주관 하에 내시 시흥위위(內侍試興威衛)의 장사(長史) 송(宋)씨가 보수를 담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연대가 중수연대인 1280년보다 앞선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사를 주관한 승재색은 고려 충렬왕 무렵에 설치되어 경전의 간행, 사찰의 중수, 불상의 개금과 보수, 불교제의 등을 담당하던 관부로 생각되며, 위의 아미타불상 중수는 현재까지 발견된 승재색의 불사활동 관련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불상은 상의 형상이 단정하면서도 중후하며 알맞은 신체비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특히 뚜렷하면서도 엄숙하게 표현된 이국적인 얼굴, 왼쪽 어깨에 몇 가닥의 짧은 종선으로 처리된 옷 주름과 그 아래로 자리 잡은 겹O형 주름 등은 1274년에 중수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상이나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좌상 등과 시대양식을 공유하면서도, 이들 상보다 훨씬 건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후기 목조불상 가운데 최고(最古)의 작품일 가능성을 보여 주며, 조각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불상으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대웅전 후불벽에는 1676년 조성된 관경변상도의 후불탱화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근래에 도난당하였다. 대웅전에는 보통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 개심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開心寺 無量壽閣(무량수각) ???.!!! 無量壽殿(무량수전)이 아닌지 ??? !!! 왜 無量壽閣(무량수각) 이지 ??? !!! ... ...

 

무량수각의 관세음보살

개심사명부전(開心寺冥府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  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6-4 (신창리))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당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24년(1646)에 세웠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이 없어서 넓어 보이는 공간에 천불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十王像)을 모시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개심사 명부전 벽

 

* 효심으로 울린 돌종 *

모량리에는 손순(孫順)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당시는 많은 변혁이 있었지만 백성 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가난의 역경을 이겨야만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손순도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연명하기 조차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 학산(鶴山)은 학자다운 가풍으로 살았기에 가세는 펴질 날이 없었는데 그 아버지마저 죽게 되자 손순은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어머니 운오(運烏)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 자식과 함께 그날그날을 연명해 가기 시작했다.

손순 내외는 날품팔이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동냥하듯 곡식 한 줌을 얻어 오거나 음식을 얻어 가지고 와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철없는 자식이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음식을 먹는 동안 자식을 업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는데, 그러자면 죽을 작정으로 떼를 쓰고 울기 때문에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들에게 저 먹을 음식만 먹으라고 수십 번씩 타일러도, 자식은 제 것을 빨리 먹어치우고는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이었다.

손순 부부는 이럴 때마다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식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식의 배를 불릴 만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다.

"저 자식을 죽일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겠소?"

"자식이야 언젠가 또 얻을 수도 있지마는 어머니는 한번 가시면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는데,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굶주려 병이라도 걸리거나 그로 인해 돌아가시면 어찌하겠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매장합시다. 지금 우리 능력으로 어머니 한 분의 생명을 지켜 가기도 어려운데 두 생명을 지키려다가 둘 다 잃고 말 지경이니 자식은 잊읍시다."

"가슴이 아프지만 부모와 자식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할 지경이라면 마땅히 부모를 남겨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손순 부부는 밤새 부둥켜안고 울다가 할 수 없이 자식을 등에 업고 괭이를 들쳐 메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량리, 서쪽에 있는 취산(醉山)으로 들어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동안 파 들어가는데 괭이로 내리치면 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 파보았더니 돌종 하나가 나왔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오."

그들이 돌종을 올려 두들겨 보니 소리가 그윽하게 울리는 것이 매우 신비스럽기 만했다.

"이렇게 이상은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다 묻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넓은 땅에서 석종을 얻었는데 어찌 자식을 묻을 수가 있겠소. 집으로 내려갑시다."

손순은 돌종을 지고, 아내는 아이를 업고 산길을 내려오며 돌 종소리만큼이나 가슴을 울렸다. 죽을 뻔 한 자식을 다시 업고 내려오자니 묻으러갈 때보다 설움이 더 깊었다.

손순은 석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더 울려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은은한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는데, 그 여운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흥덕왕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참으로 오묘한 소리로다."

왕은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갔다.

"서쪽 성 밖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맑고 멀리 들리니 필시 보통 종이 아닐 것이다. 어서 가서 알아보도록 하라."

왕의 사자가 손순의 집에 달려가 알아보고 그 사실을 흥덕왕에게 사뢰었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곽거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자 땅에서 돌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로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에 곽거라는 사람이 있었다. 효성이 지극한 곽거는 어머니의 음식을 자식에게 빼앗기자 아내와 의논하여 자식을 묻기로 했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마는 부모는 한번 잃으면 영원히 모실 수 없으니 그 아들을 땅에 묻어버리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땅을 석 자 가량 파 들어갔더니 황금 솥 한 개가 나왔는데, 솥 위에는 붉은 글씨로 '하늘이 곽거에게 준다'고 쓰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손순의 효행은 널리 소문이 퍼졌다.

과연 부모와 자식 중에 하나를 버릴 지경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서로 묻고 의논하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르치고 깨우쳤다.

흥덕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상으로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가 얼마나 장한가를 표창함으로써 귀감이 되게 하였다.

손순의 효행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시주를 해왔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모두를 그에게 다 상으로 돌려주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손순은 자기의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홍효사(弘孝寺)라하고 그 돌종을 매달아 오는 사람마다 치게 함으로써 마음에 잠든 효행심이 은은하게 울려나도록 했다.

훗날 사람들은 돌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고 했는데 잘못 전하여 삼국유사가 쓰일 당시에는 지량평(枝良坪)이라고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출처:삼국유사)

 

 

 

   

  

 

개심사심검당(開心寺尋劍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신창리) )

심검당은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단지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인데 건물 왼쪽에 앞면 3칸·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개심사영산회괘불탱(開心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6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 (신창리))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옷에는 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고,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의 머리 주변엔 7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2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부근에는 2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