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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노촌魯村 2014. 8. 12. 00:00

진남문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사적  제116호.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枳城. 枳:탱자나무 지)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 → 서산 해미읍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문화재청)

기본정보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읍성으로, 성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는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는데, 이 성은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세종 3년(1421)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문,서문,남문의 3문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만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성안의 시설은 1980~81년에 일부가 발굴ㆍ조사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상세정보

해미읍성은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해 있으며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면적 60,000여 평으로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조선조 태종 18년부터 세종 2년(1420)까지 3년간에 걸쳐 전국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았으며 성종 22년(1491)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성 안에 근무인원은 850여명이나 되는 대부대였으며 충청도의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捕虎)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후부터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서 큰 효과를 보았으나 효종 2년(1651)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서 230여년 만에 절도사영으로서의 역할을 끝나고 읍성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 후 이성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하고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현감의 임무와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 성에서 선조 12년(1578)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352척이고 높이가 12척에 4개의 문과여장 688개 및 성벽의 둘레에 3,626척의 해자가 파여지고 적대(敵臺) 18개가 계획되어 2개가 완성되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지의 기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이 380첩(堞), 옹성(甕城)이 두 곳, 남문은 3칸이며 홍예(虹霓)를 들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 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밖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된다. 읍성의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잠양루(岑陽縷)라 하였고, 서문은 지성루(枳城樓)라 하며, 북문은 암문형식으로 문루가 없다.
서문의 남측에 인접하여 수구가 성벽 아래로 암거(暗渠)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해자는 성벽에서 8m쯤 간격을 두고 윗너비가 10~11m, 아랫너비 5m, 깊이 1.4~2.4m의 규모로 북벽 쪽에 일부 남아 있다. 남문의 서측으로는 2개의 적대를 가진 치성(雉城)이 길이 7.9~7.7m, 너비 7.5~7.6m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뺴곡이 있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地)가 발견되었다
성은 해발 130m의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말녀되고, 성벽은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조 방법을 보여주는 하대상소(下大上小)의 성석 사용과 쐐기돌을 많이 끼운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다.
성(城)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으므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내포지방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는데 1866년의 병인양요, 1868년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이어 1880년경가지 천주교 박해 때 내포지방의 신도들을 체포 1,000여명의 신도를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그 때 죄인을 매달고 고문하던 호야나무가 옥사 터 옆에 있으며 죄인을 자리개질(자리개형:집행자들이 사형수의 사지를 붙잡고 넓적한 돌다리 위에 내리쳐서 숨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모양이 마치 곡식 단을 내리치며 타작하는 자리개질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돌다리를 ‘자리개돌’이라 불렀다.)쳐서 죽였던 자리개돌이 서문 밖에 있고 죄인을 생매장하나 터가 여숫골에 있어 천주교 성지로써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
호서좌영은 이 성에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1914년까지 250여 년간 지속되었 호서좌영이 폐지되면서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기관, 주택이 있었으나 1970년부터 철거하였고 현재는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출처:서산시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성벽의 중간 중간에는 축성 때마다 동원된 사람들의 출신지를 새겨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중 남문 왼쪽 아래에는 “공주 백성이 쌓았다”는 글씨가 있고, 동문으로 가는 성벽 아래에는 “여기까지는 충주 백성이 쌓았고, 다음부터는 임천 백성이 쌓았다”고 새겨져 있다.

 

 

 

 

 

 

 

 

 

 

 

 

 

 

 

 

 

 

 

 

 

 

 

옥사

   

순교기념비

 

 

호서좌영

 

 

동헌

 

 

책실

해미읍성내아

 

 

객사

 

  

 

   

동문은 잠양루(岑陽縷)

서문은 지성루(枳城樓)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

정분문(靜氛門)이라 불렸던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