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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산청 덕양전(山淸 德讓殿)

노촌魯村 2014. 10. 25. 10:12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사적  제214호.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전구형왕릉 → 산청 전 구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 2019년 5월 2일 탐방















 김유신장군 시능터

  

구형왕릉 동쪽편의 암벽에 석함이 있다왕릉 앞쪽 절벽에 세로 70cm, 가로 40cm의 석문이 있고 이곳 석실에서 칼, 제기, 족보, 갑옷 등이 나왔다고 전해진다이 석함은 장보암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흔히 김해김씨 족보를 석장대보라 일컫는데 이는 이 석함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김유신장군 사대비射臺碑 

 

산청 덕양전(山淸 德讓殿)

위치 : 경남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로 995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은 조선시대 사당으로 전구형왕릉의 재실이다. 19837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되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덕양전은 조선시대 사당으로 전구형왕릉의 재실이다. 19837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되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막향화를 드리고 있다  

532(신라 법흥왕 19) 양왕은 금관가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옮겨와 5년 뒤 승하昇遐하였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는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1898년 승선전(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였다. 1930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991년 중건하였다  

가락국 제10대 왕인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양왕은 신라 법흥왕 19(532)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 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다. 광무 2(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처 : 산청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