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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을미년 맞이 특집진열:“아름답고(美) 착한(善) 동물, 양(羊)”

노촌魯村 2015. 2. 19. 00:00

 

국립경주박물관 을미년 맞이 특집진열:“아름답고(美) 착한(善) 동물, 양(羊)”

 

○ 기간: 2015. 2. 17.(화) ~ 5. 3.(일) (76일간)

○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

1. 전시품 목록  

2. 설명 원고

1) 전시를 개최하며

2015년은 을미년(乙未年) 양(羊)띠 해입니다. 양은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여덟 번째 동물로서 남남서쪽을 가리키며 오후 1시~3시에 해당합니다. 양은 온순한 성질로 인해 예로부터 평화와 순종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희생양(犧牲羊)이란 말도 종교 의식에 바치는 제물(祭物)로 양을 선호했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美(미: 아름다움), 善(선: 착함), 義(의: 올바름), 祥(상: 상서로움) 처럼 羊(양)이 들어간 한자에는 좋은 뜻을 지닌 것이 많습니다. 양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양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중국 동한(東漢: 25~219년) 초, 유조(劉照)가 쓴『석명(釋名)』이란 책에 삼한(三韓)에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또한『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599년에 백제가 다른 동물들과 함께 양 두 마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에서 양 기르기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 양들이 어떤 종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인 820년에 고양(羖羊: 염소로 추정) 두 마리, 백양(白羊) 네 마리, 산양(山羊) 한 마리 등을 일본에 보냈다는『일본후기(日本後紀)』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에 여러 종류의 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918~1392년) 정종(재위 945~949년) 때는 개경 근처에서 왕실의 식용으로 양을 길렀다고 합니다. 1116년(예종 11년)에는 요(遼: 916~1125년)나라의 유민이 양 수 백 마리를 갖고 투항하였고, 1169년(의종 23년)에는 금(金: 1115~1234년)나라에서 양 2천 마리를 보내온 것으로 보아, 당시 북방 민족과의 교류로 양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1392~1897년)에는 양장(羊場)을 두어 양을 길렀으며, 제물로 썼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양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기와 젖, 그리고 가죽과 털 등을 주는 헌신적 동물인 양을 사람들은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양을 어떻게 형상화하였을까요? 양의 해를 맞이하여 옛사람들이 만든 양들을 살펴보며 양의 미덕(美德)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우리나라의 토종 양은 어떤 종류일까?

오늘날 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곱슬거리고 부드러운 털이 몸에 가득 난 초원의 면양(綿羊: sheep)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면양은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양의 한 종류입니다. 우리나라의 토종 양은 면양보다는 산양(山羊: goral)에 가까웠다고 추정됩니다. 본래 양(羊)이란 한자도 면양과 함께 산양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산양은 털이 곧게 자라며, 암수 모두 턱수염과 머리뿔을 지닌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산양의 생김새는 수염(鬚髥) 달린 소[牛]를 뜻하는 염소(goat)와 비슷합니다. 염소는 산양을 가축화한 동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십이지의 미(未)에 해당하는 동물은 면양이 아니라, 염소와 닮은 산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