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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재필(徐載弼) 박사(博士) 본가지(本家址)

노촌魯村 2015. 3. 5. 11:33

 

 

 

서재필(徐載弼) 박사(博士) 본가지(本家址)(충남 향토문화유적 제36호.충남 논산시 연무읍 왕릉로 48번길 24)

서재필은 서광언과 성주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친정인 전라남도 동북군 가내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그를 낳았다. 그러나 고향은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로 부모 형제와 친척이 모두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아왔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어렸을 때 6~7년 가량 살았다」하였고 「이곳이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나의 고향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언에게는 아들 재춘, 재필, 재창, 재우 4형제와 연일인(延日人-전남 창평군) 정해은에게 출가한 딸이 있었다. 그런데 서재필은 5촌 당숙인 서광하에게 입양이 되었고, 7살 때 양모쪽으로 외숙이 되는 김성근의 집으로 상경하여 학문을 닦으면서 1879년 전강에 응시 급제하였다. 이 때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박영효 등과의 교유를 통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은 외숙 김성근과 친척간이었고, 서재필과 아저씨벌되는 서광범과는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변혁인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으로, 정변의 실패는 논산에 살던 일가친척이 비운을 맞이하게 된 곳이 이곳이다.(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재필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1994년 서재필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여 4월 8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이 때 광산김씨의 유해(1994년까지 논산시 연무읍 화석리 뒷산에 초라한 무덤으로 있었음)를 봉환하여 같은 날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출처:논산시청)

 

 

 

 

서재필(徐載弼) 박사(博士) 연보

1864

1월 7일 전남 보성에서 출생.

1870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 김성근 밑에서 성장.

1884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일본으로 망명.

1885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1889

콜롬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1889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

1896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1889

미국으로 출국.

1947

귀국하여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시국 혼란으로 미국으로 돌아감.

1951

1월 5일 미국에서 사망.

1977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