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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

노촌魯村 2015. 3. 6. 00:30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4번지 외 27필)

성충(成忠), 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의 3충신으로 꼽히는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곳을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뒷편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덤지역의 동남쪽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있다.
원래 무덤 일원은 돌덧널(석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출처:문화재청)

 

성충(成忠), 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의 3충신으로 꼽히는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곳을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뒷편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덤지역의 동남쪽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있다.

원래 무덤 일원은 돌덧널(석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장군(階伯將軍)의 유허지(遺墟地)로 전해지는 곳이다. 계백(?∼660)장군은 성충(成忠), 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三忠臣)으로 꼽힌다.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 나당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장군은 5천여명의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황산(黃山)벌에서 김유신 장군의 5만대군과 싸웠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신라 김유신 장군은 계백장군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그 부근의 백제민들이 몰래 시신을 걷어들여 급히 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찾지 못하였다가 1966년 찾게 되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봉분이 반이상이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부적면민(夫赤面民)들에 의해 계백장군묘을 복묘(復墓), 지석을 안치한 후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둘레 47.6m, 직경 15.15m, 봉분높이 6.5m로 복묘하였고 1976년 5월 19일 성분(成墳)하였다.
현재는 논산인들의 숙원사업인 계백장군 묘역에 대한 성역화(聖域)사업이 추진되고 있다.(출처:논산시청)

 

 

 

 

 

 

 

 

 

충장사(忠壯祠) : 5천결사대 와 함께 황산벌에서 신라군(新蘿軍)과 싸우다 전사한 충절(忠節)의 표상(表象)이신 백제 충신(忠臣) 계백장군(階伯將軍)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며, 위패에는 백제충신계백장군(百濟忠臣階伯將軍)이라고 적혀 있고 충장사에 안치된 영정은 문화재청에 등록된 계백장군의 유일한 표준영정이다.
또한 충장사는 출입구와 사당에 이르는 길이 각각 세개의 문과 길로 되어있는데 이는 삼문삼도(三門三道)라 하여 궁궐(宮闕)이나 종묘(宗廟) 사원(寺院) 등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백장군 동상

 

 

 

 

 

 

 

 

 

백장군 동상에서 본 탑정호  : 눈을 뜨기 조차 힘들만큼 강렬한 빛속에서 논산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탑정호는 옥토의 젓줄이다.

햇살은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세상을 감싸지만 그 눈부심으로 가끔은 인간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태양을 향해 당당히 마주선 곳이 있다. 거기가 바로 탑정호이다.

수려한 대둔산의 물줄기를 담아내는 탑정호는 물이 맑기로도 유명하다. 그 곳에 가면 계절과 상관없이 근심이 풀어진다.

산은 강을 품고 강은 들을 품고 살지만 호수는 산과 강과 들을 품고 산다.

바다만큼이나 넓고 하늘만큼이나 깊은 호수가 바로 탑정호다.

탑정호는 서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맛이 다르다. 제일 권하고 싶은 곳은 부적 신풍리 쪽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일 것이다. 호수를 깔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보노라면 왜 논산이 노을의 고장인가를 알게 된다.

그 자리에 있어 본 사람은 잠시나마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고 인생을 관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높은 하늘의 거울이 되어 하늘과 호수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 논산시청)

백제군사박물관 : 백제 사비시대 5방 가운데 동방이었던 득안성 지역으로 천혜의 요충지이자 군사상 중요 거점지역 논산..

계백장군유적지 내에 위치한 백제군사박물관은 ‘백제군사’라는 성격을 부여하여 전시물을 구성, 백제시대의 유물은 물론 그 시대의 군사적 모습을 전시하는 등 백제의 군사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백제군사박물관은 2000년 설립계획을 수립하여 2004년 9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건축면적 2,489㎡)로 건립되었고, 주요시설은 3개의 전시실과 정보검색실, 실내ㆍ외 체험실 그리고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유물과 영상, 그래픽, 디오라마 등을 통해 백제의 군사와 호국이라는 독창적인 주제를 가지고 전시하고 있다.

백제군사박물관은 앞으로 백제의 군사문화를 통하여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호국정신을 키우는 역사ㆍ문화ㆍ교육의 장이 되도록 박물관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군사박물관 바로가기

  : http://museum.nonsan.go.kr/museum.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