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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전견훤묘(傳甄萱墓)

노촌魯村 2015. 3. 5. 00:30

 

 

전견훤묘(傳甄萱墓.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번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한 이 묘는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867∼935)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견훤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신라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몇몇 신하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봉기가 심해졌다. 이때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워 40여년간 다스렸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황산불사(黃酸佛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을 때 전주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을 하였으므로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해 등창이 나 황산의 절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견훤(甄萱 ; 867-935) 후백제의 시조. 재위 892-935.

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견훤은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지금의 原州)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全州)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출처:백제군사박물관)

 

전견훤묘(傳甄萱墓)에서 본 논산시 연무읍 벌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