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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노촌魯村 2015. 4. 4. 05:32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명승  제40호.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 등 (지곡리))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출처:문화재청)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출처:담양군청)

 

 

 

 

 

 

 

 

 

 

  

 

 

 

 

 

 

 

 

 

 

 

 

 

 

 

 

 

 

 

 

 

 

 

 

 

 

 

 

 

 

 

 





 

조선시대 정원 드림팀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오래된 정원을 보면 세월이 묵은 흔적이 도시의 삭막함을 밀쳐내고 자연 속에 묻힌 간결한 공간은 시적 상상력을 자아낸다. 이 편안함에 오감을 맡기고 있자면 문득, 이곳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태초의 정원인 에덴동산은 신이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요즘의 정원은 설계가와 시공자가 따로 있고 직업 조경가도 많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원은 주인은 있지만 누가 밑그림을 그렸고 어떻게 연못을 만들었는지 오리무중이다. 정원을 여럿 만든 유명한 정원가는 중국과 일본에 흔하게 나타난다. 중국 명나라 때 계성의 원야에 보면 정원을 시공하는 장인보다 주인인 설계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했을 만큼 다른 나라에선 일반적인 사회현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정원을 만든 최고의 드림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로 면앙 송순(1493-1583), 하서 김인후(1510-1560), 소쇄옹 양산보(1503-1557)이다. 송순은 면앙정을 조성하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김인후는 인종의 스승으로 당대 성리학의 대가이며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다. 이들은 학문적 교우이면서 친인척관계로 조선중기 대표적 정원인 소쇄원(명승 제40)의 조성에 드림팀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각자의 역할을 보면 송순은 정원공사 자금을 댄 투자자이자 자문역할을 했고 양산보는 정원설계와 시공을 맡았으며 김인후는 활용 프로그램 전문가였다.

송순은 관찰사로 있을 때 소쇄원의 증축에 소요되는 재물을 지원했는데 나중에 그가 면앙정을 지을 때 양산보가 돕기도 했다. 양산보는 고경명의 시에 보면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고 매화나무를 직접 심는 등 조성에 직접 참여한 정원가였다. 20대에 초정인 소쇄정을 시작으로 40대에 지금의 정원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김인후는 성리학적 소양과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 소쇄원 48영시를 짓고 소쇄원도를 탄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목판본은 당시 정원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록화면서도 각 정원공간에서의 행위와 함께 오감을 통해 집약된 상징성을 담고 있다. 소쇄원도는 당시 문인화의 산물로 유행했던 산거도, 별서도, 제택도 같은 그림과도 차별된다. 후손들은소쇄원도의 가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원림의 천석이 변천될 뻔하다가 이 원도가 그려져서 전해지게 되었으니(중략), 이후 여기를 보는 사람들은 이 원도를 근거삼아 우리 선조의 숨어 지내며 쌓은 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소쇄원사실 발문 중에서; 김덕진, 2011).’ 특히 소쇄원은 산수화의 전체 구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저 바라만 보는 정원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 속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정원 즉 시경의 경지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김인후는 정원시를 통해 소쇄원에 꽃과 나무, 바위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직접 담당했다. 호남가사문학의 산실이기도 한 담양에서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3명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시대 전통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