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주/경주인근자료

「良志使錫(양지사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기획전. 2015. 9.22.~12.31. -

노촌魯村 2015. 9. 23. 11:02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오는 22일부터 12월 31일까지 신라 사찰에서 발굴된 출토 유물을 선보이는 기획전시「良志使錫(양지사석)」을 국립경주문화연구소 출토유물보관동 전시실에서 개최한다.

* 良志使錫(양지사석): ‘양지 스님이 석장(錫杖, 지팡이)을 부리다’라는 의미. 삼국유사 <앙지사석> 조(條)에는, 양지 스님이 지팡이 끝에 포대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시주를 받아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 등 양지 스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음

이번 기획전은 1,300여 년 전 신라의 대표 조각가 양지 스님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사천왕사(四天王寺) 출토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甓塼)의 복원을 기념하고, 양지 스님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뛰어난 재능과 예술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칠한 가로 약 70㎝, 세로 약 90㎝, 두께 7~9㎝의 사각형 벽돌로, 표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神)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1915년 녹유신장벽전의 부서진 조각들이 최초 발견되었으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2012년 시행한 사천왕사 터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조각이 수습되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뛰어난 조형성과 높은 완성도로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를 통해 녹유신장벽전이 사천왕사 탑의 기단면석(基壇面石)이었음을 밝혀내었으며, 최근 2년간의 연구 끝에 출토된 200여 점의 조각들을 활용하여 3종의 녹유신장벽전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 기단면석(基壇面石): 기단부의 기둥석 사이를 막는 판석

이에, 이번 기획전은 발견 100년 만에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가 공개되는 녹유신벽전을 비롯하여 ▲『삼국유사』속 양지 스님 ▲ 양지 스님의 행적 ▲ 사천왕사 창건 기와와 전돌 ▲ 석장사 터 출토 유물 ▲ 녹유를 칠한 보물 등 다양한 주제로 양지스님의 예술적 재능과 함께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재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사천왕사 목탑 기단부를 재현하여 목탑을 장식하였던 녹유신장벽전의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녹유신장벽전과 같은 시기에 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 창건기 유물을 함께 전시하여, 통일신라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이자 호국사찰로서의 사천왕사를 재구성한다. 그 외에도 양지 스님이 머물렀던 석장사 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신라 왕경지역에서 발견된 녹유를 바른 유물들이 함께 전시된다.

* 성전사원(成典寺院): 통일신라 시대에 국가가 직접 관리한 사찰로, 사천왕사를 포함하여 감은사(感恩寺), 봉성사(奉聖寺) 등 7개의 사찰을 일컬음(출처:문화재청)
















복제품

복제품

복제품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진 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의 조각명장 양지 스님

 

 박윤정(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신라의 대표적 예술가를 꼽자면,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거문고) 백결, 그리고 조각가 양지스님이 있다. 三國遺事卷第四 義解 第五 <良志使錫>조는 신통력과 함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던 신라 승려 양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조상이나 고향은 현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다수의 연구자들은 양지 스님이 선덕여왕 때뿐만 아니라 문무왕 때까지 경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승려였다고 추정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신라 수도 경주에는 양지라는 이름의 스님이 살았다. 조상도 고향도 알려지지 않은 한 승려가 1,3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걸출한 예술 세계와 더불어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우수한 불상들 때문일 것이다.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및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 팔부신장상,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상 등 약 5m 이르는 거대한 불상에서부터 20~30정도의 작은 기와까지, 이토록 다양한 걸작이 모두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빗대어 이탈리아에는 미켈란젤로, 신라에는 양지 스님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니, 그 종횡무진의 예술 세계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三國遺事<良志使錫>조에는 양지스님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영묘사의 불상을 만들 때 도성 안의 남녀들이 함께 불상의 재료가 되는 진흙을 날랐다고 한다. 그때 부르던 노래가 향가로 전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풍요라는 향가이다. 오다 오다 오다/슬픔 많아라/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공덕 닦으러 오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경주 사람들은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줄곧 이 노래를 불러왔는데, 이 역시 양지 스님의 행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三國遺事의 저자 일연 스님은 양지 스님을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족했으나, 큰 인물(大方)로서 하찮은 재주에 숨었던 자라고 하겠다.”라며 애석한 극찬을 하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2012년까지 신라 호국사찰 사천왕사 터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녹유벽전의 여러 조각을 수습하였으며, 3종류의 벽전을 모두 복원하여 2015년 이를 기념하는 <良志使錫>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