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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노촌魯村 2016. 4. 18. 05:32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사적 제170호.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출처:문화재청)


주차장에서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의 77대손 공덕성박사가 도산서원 원장 재임시 쓴 글)

鄒魯之鄕

庚申十二月八日 敬詣陶山書院 拜退溪先生 講堂展仰遺規 益覺欽 刻石爲記 曲府孔德成

경신년 12월8일 공경희 삼가 도산서원에 나아가 퇴계선생 신위에 배알하고 강당에 올라 끼치신 원규를 읽고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한다. 곡부 공덕성 쓰다



 시사단(試士壇)

시사단은 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있는 비각이다. 1792년(정조 16) 정조가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시(科試)를 보인 곳이다. 정조의 제문으로 올리는 서원의 제향에는 7,228명의 선비가 참여하였다 하고, 과거 시험에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그중에서 급제 2명, 진사 2명, 초시 7명을 뽑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제가 걸렸던 자리에는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도산(陶山) 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이로다/ 단(壇)에 계급(階級)이 있고 물엔 연원(淵源)이 있나니/ 단(壇)에 오르고 물에 임(臨)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이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시사단이 물에 묻힐 처지가 되자 단을 더 올려 수면 위로 솟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열정(井)

 





도산서당 :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서원의 구역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서당은 퇴계 이황 생전에 생전에 유생들을 모아 교육하던 곳으로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선생의 실천적 학문과 검소함이 잘 나타나 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가 도산서당의 구역이다.







몽천(蒙泉)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이 집이 ‘공(工)’자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工)’자가 옆으로 누워 있는 형상으로, 동쪽의 도산서당 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쓴 글씨인 것이다.

‘공(工)’자 모양의 아래쪽 일선, 그러니까 도산서당 쪽 일선에는 남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작은 사각 마루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이 시습재이다. 그 반대쪽인 위쪽 일선의 남쪽으로 자리 잡은 마루방은 관란헌이다. 이곳에서는 전에 낙강의 굽어 도는 물줄기가 잘 보였다고 한다. 오늘날은 호수로 바뀌어 옛날 정취를 느낄 수는 없다. 중앙에 일선으로 내려 그는 것은 지숙요이다. 이곳은 주로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 중에서 나이 많은 축이 머물렀다고 한다. 1561년 완성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문(進道門)

광명실(光明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安東 陶山書院 典敎堂.보물  제210호.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출처:문화재청)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


유생들이 기숙사인 서재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安東 陶山書院 尙德祠 및 三門.보물  제211호.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이황 선생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쓴 분이다.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은 상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앞면 기둥은 계단 높낮이때문에 다른 기둥보다 길이가 길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었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문화재청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옥진각(玉振閣) : 도산서원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옥진각은 퇴계 이황 선생의 유물전시관이다. 옥진각은 ‘집대성 금성옥진(集大成金聲玉振)’의 줄임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유물 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로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유품인 지리, 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매화연 옥서진 등의 문방구, 청려장, 매화등, 투호, 혼천의 등이 소장되어 있다.













()를 담은 건축, 서원

 

조선은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택할 것을 주장하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관련된 건축이 상당히 많이 건립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건축이 서원이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두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묘나 궁궐, 향교와 같은 대부분의 유교 건축은 중심이 되는 건물과 출입문을 잇는 남북방향 종축선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배치를 갖는다. 서원 역시 두 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당이 앞에, 사당은 뒤로, 일렬로 놓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순서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우리나라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며, 서원은 학문을 연마하면서 자연을 즐기기 좋은 산이나 계곡에 자리한다. 따라서 서원은 주로 경사진 곳에 자리하는데, 강당이 뒤에, 즉 더 높은 곳에 놓일 경우 선현의 뒤를 내려다보게 되므로, ()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강당은 앞쪽, 즉 아래에 놓이고, 사당은 뒤쪽, 즉 위에 놓였다. 그런데 선생이 강당 마루에 앉아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선생이 사당을 등지고 앉으므로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게 된다. 이에 조선 중기 유학자인 동암 유장원이 편찬한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는, ‘사당과 강당이 일직선에 있어도 지세의 높낮이가 현격하면 등을 돌리고 앉아 미안하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즉 경사지에 놓이면 괜찮다는 건데, 서애 유성룡은 이마저도 꺼려하여, ‘지세가 낮더라도 등을 돌리고 앉는 것은 미안하다. 사당은 동쪽 가까운 곳에 배치해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퇴계 이황과 월천 조목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의 사당인 상덕사는 약간 동쪽으로 비껴 서있다. 또 강당인 전교당은 좌우 대칭의 틀을 깨고 마루 서쪽에만 방을 둔 비대칭 평면을 갖는데, 이는 동쪽에 위치한 사당의 높은 위계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 서원은 옥산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같이 사당과 강당이 앞뒤로 중심축을 이루어 배치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건물은 화려하거나 크게 짓지 않도록 지어져, 당대의 성리학적 가치관이 건축배치와 조형에 나타나게 하였다. 선비()의 수기(修己)와 대부(大夫)의 치인(治人)과 같이, 안이 탄탄하고 밖에 모범이 된다.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게 자신을 가꾸고, 사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요즘, ()를 담은 서원건축의 확연한 모양새가 마음에 와 닿는다.

조상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