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구미

구미 수다사(水多寺)

노촌魯村 2016. 4. 24. 21:47

수다사 일주문

수다사(水多寺) :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에 위치하고 있다. 『수다사약지(水多寺略誌)』에 의하면, 830년(흥덕왕 5)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연악산 상봉인 미봉(彌峰)에 백련이 한 송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창건하여 연화사(淵華寺)라 하였다고 한다.

976년(경종 원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185년(명종 15)에 각원대사(覺圓大師)가 중창하여 사명을 성암사(聖巖寺)라 하였다. 이후 1273년(원종 14) 큰 수해를 입어 비로전·나한전·시왕전·청천요사(淸泉寮舍) 등만 남아 있었다.

1573년(선조 5) 사명대사가 극락전을 중수하고 대웅전이라 개칭하고 청천료(淸泉寮)를 수리하여 극락당이라 개칭하고 만세루(萬歲樓) 24칸과 9개 방사(房舍: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수다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1705년(숙종 30)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시왕전·극락당 등만 남게 되었다.

조성 연대가 알려진 불상은 1186년(명종 15)에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상이다. 현재 명부전에 있는 「칠황지옥도」는 전국적으로도 희귀한 벽화로 상태가 완전하며 십대왕상이 그려져 있다. 1981~1982년에 걸쳐 5천만 원을 들여 명부전을 보수하였다. 현재 수다사 경내에는 대웅전·명부전·삼층석탑·동종·부도·목조지장보살좌상·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미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龜尾水多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4호.경북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산12번지)

연악산(淵岳山) 수다사는 신라 흥덕왕 5년(830) 진감선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그 후 고려 경종 원년(976) 화재로 인하여 건물이 다소 소실되고 극락전과 청천료만 남았다. 다시 명종 15년(1185) 각원대사에 의하여 대대적인 불사가 이룩되었다. 그 후 원종 14년(1273) 대수해로 인하여 대부분의 전각이 유실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여 절의 이름을 수다사라 하였다.
대웅전 내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근래의 개금불사로 인하여 외형상 목조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소나무의 결이 보인다. 나발의 두정(頭頂)에 약간의 육계의 흔적이 보이고, 가늘게 뜬 눈, 코, 입술 등의 조각 수법이 정제되어 있으며, 우너만한 상호와 짧은 양 귀, 목에 둘러진 삼도가 조화를 이루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무늬 조각이 세련되었으며, 무릎 부분이 높고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사찰측에 의하면 원래 삼존상이었으나 양 협시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 원각사에 봉안되고 있고, 관세음보살상은 대구 서봉암에 옮겨 봉안되었다.
이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 유물은 도난 당하였지만, 다행히 구미 원각사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불상 조성기가 확인되어 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연대와 유래를 파악하는데 기본 자료가 되고 있는 기록에 의하면 순치(順治) 6년 9월에 일선부의 서쪽에 위치한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수다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형면에서 약간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은 무릎과 넓은 무릎폭 등에서 조선 후기 목조불상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원각사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유물 가운데 포함된 조성기에 순치 6년이라는 조성시기가 기록되어 있고, 조성기의 종이질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조성시기가 17세기 무렵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이 불상은 미술사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수다사 대웅전에 모셔진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목조불상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수다사에는 이 불상을 포함하여 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는데, 한 불상은 선산읍 원각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2호로 지정(1999년 8월)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대구의 서봉암에 이안되었다고 하나 현재 그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함께 조성된 원각사의 목조보살좌상에서 확인된 불상조성기에 따르면 고려 명종 원년(976년) 화재로 건물이 다소 손실되고 극락전과 청천료만 남았다. 다시 명종 15년(1185년) 각원대사에 의하여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다. 그후 원종 14년(1273년) 대수해로 대부분의 전각이 유실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고 수다사로 명명한 유서깊은 사찰로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구미시청 자료)

* 청 순치(順治) 6년 : 1649 기축

구미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형 면에서 약간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고 넓은 무릎 폭 등에서 조선 중기 목조 불상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불상의 복장 유물(腹藏遺物)은 도난당하였지만, 다행히 선산읍 원각사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가 확인되어 조성 연대와 유래를 파악하는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구미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龜尾 水多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의 대좌 : 용두가 있다.

원본은 현재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수다사에는 모사본이 걸려 있다.

구미 수다사 영산회상도(龜尾 水多寺 靈山會上圖.보물  제1638호. 직지성보박물관 보관 중)

형태 및 구성 :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주존 탱화로서, 폭 39~40㎝ 정도의 세마포(細麻布)를 7폭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한 바탕의 중앙 연화좌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정수리로부터 상부로 퍼져나가는 광명은 석가모니의 설법이 시방 세계를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좌우에 8명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은 석가모니불 좌대 양옆에 붉은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의 좌우에 있는 사천왕은 비파, 검, 용과 여의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상 위 좌우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옆에 배치되어 있는데, 범천은 3목(目)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외 상단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부처,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포함한 10대 제자, 신장(神將) 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주제는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특징 : 주존의 광배와 천상을 표현한 오색 구름 등 17세기 불화 양식을 계승하면서 붉은색과 녹색의 대비가 강해지고 채색이 짙어지는 18세기 불화 양식을 띠고 있다. 즉 화면색은 주조색인 홍색과 녹색에 분홍, 주홍, 연두, 흐린 남색 등 밝은 색을 두껍게 칠하여 전체적으로 차분한 색감을 띠고 있어 앞 시대, 곧 17세기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답습하고 있다.

인물의 모습은 18세기 불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을 표현했지만 자연스러움이 떨어지고, 각 존상의 자세나 신체의 표현도 어색하고 둔중하게 처리되어 있다. 원본은 현재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수다사에는 모사본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 탱화의 하단에는 4단으로 나누어진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탱화의 조성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중 2단에 ‘옹정구년신해오월이십사일선산부서연악산수다사대웅전후불탱봉위(雍正九年辛亥五月二十四日善山府西淵岳山水多寺大雄殿後佛幀奉爲)’를 중심으로 하여 승속(僧俗)의 조성 참여 인물 및 도익(道益), 혜학(慧學), 신초(信初), 처한(處閑) 등 네 명의 화원비구(畵員比丘)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화원(畵員)은 같은 장소에 소장되어 있는 지장탱화(地藏幀畵, 1731)를 그린 인물들이지만, 여타의 그림에서는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활약했던 화원의 이름을 대부분 알 수 없는 현재의 형편을 감안하면 주목되는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자료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잘 보존되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탱화의 하단에는 4단으로 나누어진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탱화의 조성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중 2단에 ‘옹정구년신해오월이십사일선산부서연악산수다사대웅전후불탱봉위(雍正九年辛亥五月二十四日善山府西淵岳山水多寺大雄殿後佛幀奉爲)’를 중심으로 하여 승속(僧俗)의 조성 참여 인물 및 도익(道益), 혜학(慧學), 신초(信初), 처한(處閑) 등 네 명의 화원비구(畵員比丘)가 기록되어 있다.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水多寺乾隆37年銘銅鐘.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5호.경북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산12번지 수다사)

종신(鍾身) 정상부에는 쌍룡이 입에 여의주를 한 개씩 물고 있으며, 두 용이 교호(交互)되는 정상에는 큼직한 여의보주가 있는데, 용통(甬筒)은 없으나 윗면 중앙에 지름 1㎝의 원공이 관통되어 용통을 대신하고 있다. 이 용뉴(龍鈕)는 용린(龍鱗)이 사실적이고, 양발과 양눈, 코, 이빨 등이 웅건하다.

어깨 부위는 1조의 원대(圓臺)뿐이며, 세조(細條)의 원대를 양주하여 상대를 구분하고 있으며, 상대에는 네 곳에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는데, 범자는 단엽 32판이 돌려진 연화원권(蓮華圓圈) 내의 세조원대(細條圓帶) 내에 각자되었으며, 4곳 모두가 동일한 글자이다.

각자 밑의 종신부에는 4구의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서로 동일한 양식으로서 원형의 두광을 구비하였고 머리에는 화사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호는 원만하고 각부의 천의가 유려하다. 보살 사이의 간지 4군데에는 유곽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사다리형’으로서 주곽에는 기하학적인 사선문을 양각하였고, 그 안에 유두를 원각하였다. 이것들은 단엽 12판을 돌린 연화문권 중앙에 돌기되어 있다.

하대는 하부에 2조의 원대가 표시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종의 구연부가 두터워 한국 범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종신 위로 올라갈수록 형태는 좁아지고 있고,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장방형 대를 만들었는데, 그 안에 종(縱)으로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특징 : 수다사 대웅전 내에 위치한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 아래에 있으며, 수다사에 있는 유일한 동종이다. 4구의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대를 만들고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9곳에 1행씩 모두 9행이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건륭삼십칠년임진 삼월일 화주근징장승통광능 경상우도 선산 서령 연악산 수다사 중종개조 중이백근야 삼강(乾隆三十七年壬辰三月日 化主僅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 善山 西嶺 淵岳山 水多寺 中鍾改造 重二百斤也 三綱)’이다.

의의와 평가 : 조선 시대에 조성된 범종은 많이 있지만,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형태, 크기, 문양에 있어서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우수작에 속한다. 또한 이 범종의 명문에는 ‘건륭37년’에 이 범종을 수다사의 중종(中鍾)으로 개조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보다도 앞서 이미 다른 형태의 동종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이전 종의 양식을 모방하여 주조한 것인지, 혹은 전혀 다르게 개조하였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명문에 ‘중종(中鍾)’이라 되어 있으므로 이보다 큰 대종이 존재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현재의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명문이 뚜렷하고, 건륭 37년, 즉 1772년(영조 48)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므로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과 유곽, 용뉴 등의 양식 및 수법은 다른 예와의 비교, 연구에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윗면 중앙에 지름 1㎝의 원공이 관통되어 용통을 대신하고 있다. 이 용뉴(龍鈕)는 용린(龍鱗)이 사실적이고, 양발과 양눈, 코, 이빨 등이 웅건하다.

수다사 명부전(水多寺 冥府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9호.경북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산12번지 수다사)

 수다사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연악산(淵岳山) 꼭대기에 흰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처음 건립하여 연화사(蓮華寺)라 하였다. 그후 불타버린 것을 고려 명종(明宗) 15년(1185)에 각원대사(覺圓大師)가 다시 절을 짓고 성암사(聖巖寺)라 하였다. 원종(元宗) 14년(1273) 큰비로 허물어졌는데 조선 선조(宣祖)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다시 지어 수다사라 고쳐 불렀다. 숙종(肅宗) 10년(1684)에 화재로 인해 현재의 건물만 남았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공포가 기둥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형식이면서 외목도리 없는 화두계(花斗系)의 옛 형식이다. 이 같은 형식은 신라시대 건축에 쓰인 공포 형식으로 알려져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출처:구미시청)

수다사 명부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에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원래는 더 큰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에는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여러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내부 벽에 그려진 ‘지옥도(地獄圖)’는 영조 42년(1771)의 제작시기를 기록하고 있고 상태가 거의 완벽한 귀중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수다사 삼성각
  
수다사 산신각
  
수다사 맷돌
수다사 폐탑재
요사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