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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구미

주륵사폐탑(朱勒寺廢塔)

노촌魯村 2016. 5. 6. 21:00

 

 

 

 

주륵사지로 가는 길

 

주륵사폐탑(朱勒寺廢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5호.경북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123번지)

주륵사터에 무너져 있는 석탑으로, 부재들이 많이 없어지고 땅 속에 묻혀있어 탑의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땅 위에 드러나 부재들을 통해, 2층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이 보인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완만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현재 남아있는 부재의 크기로 보아 그 크기가 웅장하여 불국사 석가탑 못지 않은 대규모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성기인 8∼9세기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출처:문화재청)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주륵사는 냉산 서쪽에 있으니, 고려 안진이 찬한 승혜각비명이 있다(朱勒寺 在冷山西 有高麗安震所撰 僧慧覺碑銘)”고 기록되어 있다. 『일선지(一善誌)』에는 “주륵사는 백마산 아래 있으며, 고려 안진이 찬한 승혜각비명이 있다.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을 때, 기와를 철훼하여 폐허가 되어 지금은 유지만 있다(朱勒寺 在白馬山下 有高麗安震所撰 僧慧覺碑銘 府使 李吉培 構南館時 徹毁村瓦 回廢 今有遺址)”라고 하였다.

주륵사의 폐사 관련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선산부 「궁실조(宮室條)」남관(南館) 부분에 “무신년에 부사 이길배(李吉培) 공이 비로소 정사에 임하자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였으므로 1년이 못 되어 온갖 폐단이 모두 새로워졌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마을 노인들, 전 부사인 김치(金峙) 공과 전 현감 신희충(申希忠) 군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문서를 부(府)와 감사에게 올려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로 새로 짓기를 청원하였고, 감사 홍여방(洪汝方) 공이 임금께 아뢰어 그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서, 기유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경술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지어놓은 건물이나 방들이 크고 넓고 짜임새가 있다(戊申年 府使李公吉培 始政勤於字牧 果於聽斷 曾未周歲 百廢俱新 於是鄕之耆宿前府使金公峙前縣監申君希忠 率州人申狀于府于監司 願撤廢寺朱勒之材之瓦以新之 監司洪公汝方上秦蒙允 於是募遊手 羨財 無徵命無奪時 己酉十月肇役 至庚戌二月訖工 凡作楹廳堂房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륵사 폐탑은 여러 문적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주륵사는 현재 폐사지이며, 다만 파괴된 석탑재(石塔材)와 초석(礎石)만이 산재할 뿐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륵사폐탑(朱勒寺廢塔)

 

 

 

 

 

 

 

 

 

주륵사지(朱勒寺址) 금당터

주륵사 폐탑이 8세기 중엽의 양식이므로 주륵사의 창건은 통일신라 때이며, 8세기 중엽이 하한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불우조」에 따르면 사찰 안에 고려 후기 안진이 지은 혜각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재 사역 내에 민묘 6기가 있고, 토기편, 자기편, 기와편이 산재한다. 석탑 부재가 남아 있는데, 3석의 옥개석 중 한 개는 반쯤 파괴된 상태이고, 탑의 나머지 부재들은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탑의 부재들은 민묘 주변의 치석물로 이용되어 상당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혜각비편과 귀부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륵사지의 기와편

 

 

주륵사폐탑(朱勒寺廢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