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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구미

선산 궁기동 석불상(善山 宮基洞 石佛像)

노촌魯村 2016. 5. 7. 04:26



선산 궁기동 석불상(善山 宮基洞 石佛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경북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 748-7번지)

이 불상은 도개면 신곡리 산68번지에 위치한 문수사 경내에 있는 석불 좌상(坐像)이다. 도개중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학교 증설로 인해 2008.1.10 문수사로 옮겨왔다. 불신과 광배(光背), 대좌(臺座)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광배의 윗부분과 머리 부분이 깨진 상태다.
사각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대좌 아래까지 옷자락을 내려뜨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에 들어 올려 연꽃가지를 잡고 있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는데, 손모양으로 보아 어느 본존불의 협시보살로 생각된다. 오른손에 든 연꽃가지의 줄기가 허리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광배에까지 두드러지게 올라와 있으며, 광배에는 연꽃 봉오리가 크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광배는 윗부분이 잘려 나갔지만 끝이 뾰족한 타원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배 안에는 덩쿨무늬, 연꽃무늬, 불꽃무늬, 작은 부처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광배의 뒷면에도 앉아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를 선으로 새겼는데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광배 뒷면의 부조상은 통일신라시대에 가끔 보이는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시 보살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출처 : 문화재청)

높이는 82㎝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신체에 머리는 파손이 심하지만 우뚝 솟은 육계(肉髻)의 흔적이 엿보인다. 얼굴 역시 마모가 심하여 눈, 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으며, 다소 짧게 표현된 삼도(三道)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양 어깨를 타고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는 얇게 밀착되어 신체의 굴곡을 자세히 드러내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방형의 대좌를 완전히 뒤덮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대좌 밑으로 드리워진 옷주름은 대좌의 중앙에서 반원형의 층단을 형성하며 마무리되었다. 상부가 결실된 주형(舟形)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타원형의 융기선으로 내·외곽을 구분하였고, 안팎으로 화문(花文)과 화염문(火焰文)을 조각하였으며, 광배의 뒷면에는 연화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비로자나불을 선각(線刻)하였다.
불신과 대좌와 광배가 모두 같은 돌에 조각된 보살상으로, 광배의 상단과 얼굴은 파괴되었으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양감 있는 어깨와 허리는 가늘게 표현하였으며, 가슴은 풍만하고 결가부좌한 하반신은 다소 좁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려 연봉(蓮峯)을 쥐고 있고, 왼손은 복부에 대고 연봉에서 드리워진 연꽃 가지를 받들고 있다. 이 연봉의 끝은 광배로 이어져 고부조(高浮彫)의 역동적인 운문을 표현하였는데, 이처럼 독특한 표현은 선례가 없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대 일급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균형 잡힌 신체의 비례나 섬세한 조각 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납석사지(納石寺址.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산 68)

납석사지에 관해서는 『일선지(一善誌)』 「불우조(佛宇條)」에 “납석사재신곡문암북사후유석굴곡옥수간(納石寺在新谷門巖北寺後有石窟谷屋數間)”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현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신곡리 납석사지는 도개면 신곡리 청량산 중복에 위치한 절터이다. 현재 문수사가 들어서 있는데, 조선 후기의 약사여래좌상과 1873년(철종 14)에 조성된 「산신탱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불우조」와 「고적조」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사원으로 추정된다. 도개면 소재지에서 바라보이는 속칭 청량산(淸凉山) 중복에 있는 문수사 요사에서 동북쪽으로 15m 되는 곳에 법당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 일대가 납석사의 옛 절터이다. 납석사지 뒤쪽 서북쪽으로 150m 지점 암벽에는 23.15㎡ 규모의 천연 동굴이 있으며, 길이 10m, 높이 6m, 폭 15m 크기 속에 정면 2칸의 목조기와집이 있다. 문수사로 존재한 시기는 언제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약사여래좌상과 「산신탱화」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 법등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도개초등학교에서 동북쪽 4㎞ 지점의 장자봉(壯子峰) 아래 산중복(山中腹)에 위치한다. 산 밑에는 조선시대 사기요지(砂器窯址)와 삼국시대 고분이 유존(遺存)한다. 경내에는 지대석(地臺石) 1기와 조각난 석탑재 및 와편이 산재하고 있다. 석탑재는 경내에 2, 3개 있으며, 현 문수사는 20여 년 전에 창건하였는데, 법당 내에는 일본식 목조 불감이 있다.

과거에 석탑이 있었다는데, 현재 옥개 받침 3단과 반전이 있는 전각부가 망실되었고, 화단에는 안상이 2구 새겨진 기단 부재와 사리공이 조성된 탑신 부재가 하나씩 있다. 석탑재의 실측치는 기단석 1변 길이 138㎝, 높이 26㎝, 안상(眼象) 1구 길이 49㎝, 너비 13㎝, 탑신석 49×50×13㎝, 우주 폭 9.5㎝, 사리공 1변 길이 1㎝, 지름 3㎝이다.
40여 년 전만 하여도 옥개석과 탑신석 수매가 경내에 잔존해 있었다고 하지만 그 후 탑재들이 손상되어 계단 등의 건축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현재는 부재가 한 점도 없다. 다만 석탑 부재편으로 잔존하는 것은 사찰 입구에 ‘청량산 문수사(淸凉山 文殊寺)’라고 묵서(墨書)한 표석(標石)으로, 과거에 이곳에 석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수사(文殊寺.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산 68)

문수사는 사찰 안에 전래하는 탑재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선지(一善志)』 불우(佛宇) 「납석사(納石寺)조」에 기록된 위치가 이곳과 일치하므로 문수사라 이름 붙이기 전에는 납석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래하는 연혁으로는, 1865년(고종 2) 도적의 침입으로 폐사되었고, 수년 후 혜봉선사(慧峰禪師)가 중건하였는데 이때 문수사로 사명을 정하였다 한다. 현재의 문수사는 1972년 혜향화상(慧香和尙)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문수사 경내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된 선산 궁기동 석불상이 위치해 있다.

건물은 대웅전과 2동의 요사가 있다. 절의 서북쪽 150m 지점에 천연 동굴이 있는데 길이 약 10m, 높이 약 6m이며 수도처로 알려졌다. 현재 사자암 건물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자암








사자암에서 본 풍경


지장전


산신각


부부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