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와 정조대왕 부자의 넋을 기리는 융릉·건릉(隆陵·健陵)
용주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융릉과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건릉은 화성 8경 중에서도 미려함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양지바른 곳에 놓인 두 개의 왕릉을 감싼 기품 있는 솔숲에는 정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던 정조는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탄식했다.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하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어찌 너까지 괴롭히느냐"하고 그자리에서 송충이를 이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당황한 시종들은 서둘러 송충이를 모두 없애버렸는데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능 주변에선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융·건릉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과 참나무가 들어선 황톳길은 상쾌한 심호흡이 절로 나오는 향기로운 산책로다.
재실(齋室 : 능이
화성 융릉(華城 隆陵)
화성 융릉(華城 隆陵.사적 제206호.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융릉은 사도세자(장조의황제)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하였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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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곤신지(坤申池)
융릉주변에 조성된 원형 연못 곤신지(坤申池)는 융릉이 천장(遷葬)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 장헌세자(추존 장조)의 왕이 되지못한 한을 풀어드리고자 융릉 풍수반룡농주형국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화성건릉 (華城 健陵)
화성건릉 (華城 健陵.사적 제206.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륭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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