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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노촌魯村 2016. 8. 4. 15:43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국보  제205호.충청북도 충주시 감노로 2319 (중앙탑면, 충주고구려비전시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출처:문화재청)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으로서 자연석의 형태를 이용하여 각 자면을 다듬고 비문을 새겼는데, 비두부터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여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글체는 고졸한 예서풍이다. 비문은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이 정확한 판독 가능한 상태이나 석비서두의『고려대왕』이란 명문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전부대사자, 제위, 하부, 사자』등 고구려만의 관등과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는『고모루성』이 있고,『모인삼백신라토내, 모인신라토내』라하여『신라토내』란 명문이 두곳에 있어 이는 신라아닌 다른나라 곧 고구려가 신라쪽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여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확신케 해 준다. 4면 석비인 이 비의 자, 행에 있어서는 앞면이 10행 23자씩이고 왼쪽 측면이 7행 23자씩이며 오른쪽 측면은 6행이 분명하지만 뒷면은 너비로 보아 9행 정도로 추측 되고 있다.
건비년대는 고구려 최성기인 5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단양의 적성비에 의하면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빼앗을 수 있었고 비문에 보이는『개로』는 백제의 개로왕을 말하며『신유년』은 장수왕 69년(481) 으로 보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비의 성격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여러성을 빼앗고 개척한 척경비로 보이지만 앞면과 왼쪽 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앞면 상단의 비명을 비롯하여 비문의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여서 확실한내용은 계속적인 조사연구를 요하고 있다. 오른쪽 측면에서의 글자는『임자(壬子) 벌(伐), 공(公) 중잔(衆殘), 불(不), 사(使), 소(小), 소(少)』자 등이 뚜렷하게 보이고 뒷면은 각자(刻字)의 흔적만 확인 되었다(출처:충주시청)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으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는 학설은 이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위치에 있었음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신라를 지칭할 때 ‘동이’라고 한 것과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고 하여 열등국으로 표기하였다.

둘째, 여형여제(如兄如弟)란 형제 관계 내지 상하 관계를 말하는데, 고구려가 신라 매금에게 의복 같은 선물을 하사했다는 점이다.

셋째, 신라 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는 신라 내에 파견된 고구려의 당주였을 것이고, 그가 고구려인인 ‘하부발위사자□노(下部拔位使者□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불교 전파 과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물 관계의 문구 중에서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의 용어는 이두로서 신라의 이두(吏讀)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추정된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신라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세워졌지만 물물 교환, 문화 교류 등이 빈번했고, 당주(幢主), 도사(道使) 같은 직명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금석문이라 하겠다. 또한 충주 고구려비가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고구려 남방 경략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 출처 : 문화재청(보호각 속에 있을 당시의 사진)

충주고구려비전시관 뒷편에 있는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복제품

충주 고구려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천하관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유물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으로써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중원 지방을 점령했던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반까지 70여년 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혀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충주 고구려비가 담고 있는 글자들은 하나하나가 우리 고대사를 밝혀줄 중요한 열쇠이다. 충주 고구려비에 나타난 비문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 간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고구려의 천하관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를 '동이'라 부르고

신라의 왕을 '매금'이라 칭한다.

동이東夷

동이는  중국 중화사상에 기반을 둔 말이다, 중국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에 두고 동쪽을 동이, 서쪽을 서융, 남쪽을 남만, 북쪽을 북적이라고 일컬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 부른 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신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천하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매금寐錦

신라는 임금을 가리키는 말로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매금은 이사금이라는 설과 마립간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뜻이 임금을 나타낸다는 데는 일치하고 있다. 특히 매금이라는 용어는 5세기 무렵 고구려의 금석문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강자로서 지위를 확보한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서도 503년, 지증왕이 정식으로 왕호를 사용하기 직전의 과도기에 매금왕寐錦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세세토록 형과 아우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

여형여제如兄如弟

여형여제如兄如弟란 형제 관계 내지 상하관계를 말하는데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특히 5세기 고구려가 중원을 차지했을 무렵,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위치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구려의 왕이 신라의 왕에게 의복을 하사하거나 명을 내리는 등 , 충주 고구려비에 기록된 내용에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고모루성(古牟婁城) . 우별성 . 궤영跪營

궤영은 고구려 태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영으로 보는 견해와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설치한 곤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의 왕이 궤영에 이르러 교를 받고 의복을 하사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구려군의 주둔지로 고모루성과 우별성이 나온다. 고모루성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고모루성수사(고모루성에 파견된 고구려 군사지휘관)가 전부대사자인 다우환노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충주에 이르는 남진로에 있었던 성으로 보인다. 우별성은 충주나 상주, 순흥에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어 있다.

고구려의 군사령관

신라의 땅에서 군사권을 발동하라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신라의 영토를 '토내'라고 표현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국토'로 표현에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당주'는 고구려의 관직명으로 고구려군 사령관을 지칭한다.  즉 신라토내당주는 '신라 영토 내네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군 사령관'을 뜻한다. 당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출처: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입석마을의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와 나란히 있었던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마을>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