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북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臺)

노촌魯村 2016. 8. 6. 23:37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충주 탄금대(忠州 彈琴臺.명승  제42호.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1-1번지 등)

충주 탄금대는 우리나라 3대 악성(난계 박연,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중의 한 분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란 명칭이 붙은 곳이며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한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명소이다.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대에서 조망되는 남한강과 계명산, 남산 및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출처:문화재청)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3km 지점에 충주사람들에게 추억을 심어주는 명승지 탄금대가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탄금대 북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강이 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한 탄금대는 대문산, 견문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해발 100m 정도의 나즈막한 산이다.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타면서 제자들에게 노래와 가야금, 춤을 가르쳤다는 곳이며, 임진왜란 때 팔도 순변사 신립장군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며, 야외음악당과 궁도장이 있다. (출처:충주시청)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이라고 불리워 오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곳이다. 
지금부터 1400여년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 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리워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한다. 
탄금대에는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탄금대기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이 있고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근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삼국시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토성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출처:충주시청)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탄금정

 2층 누각형태인 탄금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본래 충주관아 내 연못에 천운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을 사직산에 이건되었다가, 1955년 다시 이 자리로 이건되었는데, 목조로 된 정자가 낡고 헐어 지금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열두 대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질펀하게 호반이 되어 물안개를 일으키고,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기"비가 외롭게 서 있다.



열두대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된 십수만의 왜적을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 군사와 함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면 배수진 전법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곳 열두 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순절한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이 금강변에 있듯이 탄금대 열두대가 남한강변에서 분위기를 갖게 한다. 열두대란 가야금이 12현 열두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이곳 열두대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출처:충주시청)

 '신립장군 순국지지'비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

우륵선생 비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각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



충혼탑


우남 이승만 대통령 친필


조웅장군기적비

조웅(趙熊) :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누어 의병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충주 앙성면 태자우(현 능암리 대평촌)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사실을 충청도체찰사가 행재소의 임금에게 알려 충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조웅은 깃발을 모두 흰 것으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8도의 의병 중에 “호서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곽재우)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1592년 8월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군이 항복을 권했으나 저항하다가 1592년 8월 4일 사지가 찢겨지는 고통을 겪으며 순절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