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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옥천사(固城玉泉寺)

노촌魯村 2017. 2. 19. 08:21


고성 옥천사固城玉泉寺 천왕문天王門




하마비下馬碑

고성옥천사일원 (固城玉泉寺一圓.경상남도  기념물 제140호.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산50-1번지 외 )

옥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末寺)로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義湘:625~702)이 창건하였다. 대웅전 뒤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요 건물로 옥천사자방루(경남 유형문화재 제53호)와 옥천사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제132호)가 있다. 지방루는 지은 지 300년이 넘는 우아한 건물이며 대웅전은 임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8년(1657년)에 용성화상이 다시 지었으며, 그 후 여러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귀중한 유물로는 옥천사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보물 제495호, 주로 법당에 걸어놓고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사용)와 1744년(영조20)에 제작된 삼장보살도, 지장보살도, 시왕도를 비롯하여 1776년(영조52)에 만들어진 옥천사대종(경남 유형문화재 제60호)와 조선 초의 향로(경남 유형문화재 제59호) 등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 청련암, 연대암 등이 있다(출처:고성군청)           


범종각




 

옥천사자방루(玉泉寺慈芳樓.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옥천사는 연화산 기슭에 있는 옥천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지은 절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뒤 여러 번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천사 자방루는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거나 절의 행사 때 쓰이는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던 누각이다. 앞면 7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놓인 주심포계 건물이다.
사찰에서 누각은 일반적으로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데, 자방루 역시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를 거의 같은 높이로 하여 대웅전 앞마당에서 출입하기 쉽도록 하였다. 대웅전 마당 쪽을 향하는 면은 난간을 설치하여 개방하였고 서쪽과 북쪽면은 벽을 설치하였는데, 특히 북쪽면은 7칸 모두 2짝씩의 널판장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사찰 누각으로서 대단히 큰 규모를 가진 자방루는 우아한 건물로 이 절의 품위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자滋 : 불을 자. 芳방 : 꽃다울 방


























복 뚜꺼비

 




옥천사 대웅전(玉泉寺大雄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북평리))

옥천사는 연화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이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17년(1639)에 다시 지었다.
옥천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석가모니를 모시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 8년(1657)에 용성화상이 다시 지었으며, 그 후에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2단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 앞에는 좌우에 당간지주가 있다.
옥천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법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옥천사명부전(玉泉寺冥府殿)

옥천사명부전(玉泉寺冥府殿.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북평리))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여러 차례 고치고 새로 지어 세울 당시의 건물은 없다. 절 이름이 옥천사인 것은 절 뒤에 맑은 샘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붙인 것이다.
명부전은 조선 중기 때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계에서 영혼을 재판하는 곳으로 현대 사법기관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영혼들을 재판하여 편히 잠들게 하였다고 한다(출처: 문화재청)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固城 玉泉寺 地藏菩薩圖 및 十王圖.보물  제1693호.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 (북평리))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하에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하여 조성되었다.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가 결실되어,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다. 이 9점의 불화와 함께 옥천사에는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가 전하였으나, 현재 도난당하여 남아 있지 않다.
지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2보살을 그리고, 상단에 대칭으로 6보살을 배치하였다. 상단의 6보살 중 지장보살의 좌우 보살은 정면상을 취하고, 나머지 권속들은 중앙의 지장보살을 바라보게 표현하여 화면의 구도가 짜임새 있고 안정적이다.
시왕도는 한 폭에 각 1위(位)의 시왕을 묘사한 형식을 취하였다. 각 화면은 용두가 장식된 의자에 좌정한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하단에 채운(彩雲)으로 화면을 구획하여 각 시왕에 해당하는 지옥 장면을 묘사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시왕의 권속들이 배치하고, 하단에는 지옥장면이 묘사 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시왕도는 1742년 범어사 시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졌으나, 범어사 시왕도는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다. 이후 시왕이 각각 1폭으로 조성되는 시왕도는 옥천사 시왕도에 시왕의 의자 뒤로 병풍을 추가한 형식이 다수 제작되었다. 1764년 시왕도(호림박물관 소장)나 1798년 통도사 시왕도 등이 그 예에 속하며, 이는 18세기 후반 시왕도의 전형이 되었다.
현재 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의 오염과 화면 꺾임 등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상호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상태이다. 시왕도는 개체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바탕천의 재질이 비단이며,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나한전




팔상전




칠성각




조사전




독성각


산령각


옥천각(玉泉閣)

대웅전 뒤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삼천불전




고성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보물  제495호.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 (북평리))

고성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은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이다.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이 반자는 지름 55㎝, 너비 14㎝로, 표면에 굵고 가는 선으로 4개의 테두리를 둘러 4개의 원을 만들었다.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돌출 되어 있으며, 그 다음 원에는 연꽃잎이 겹쳐서 도드라지게 새겨있다. 가장 바깥 원에는 덩굴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안쪽의 원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옆면은 중앙에 굵게 돌출된 선이 있어 위 아래로 구분되고, 선 위로 둥근 모양의 고리가 3개 있어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다. 옆면 위쪽에 쓰인 글로 미루어 보아 고려 고종 39년(1252)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자는 처음부터 옥천사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옥천사에 보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반자는 무늬가 뚜렷하고 손상이 없으며, 옆면의 글을 통해 만든 시기와 유래, 관계자의 성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금고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子'(고려23왕 환갑지년 임자4월12일 재어경사공인가 중주성지리산 안양사지반자)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는 금구(禁口) 또는 반자(半子, 般子) 라고 불리며 처마 밑이나 법당 안에 두고 망치 모양으로 생긴 당목(撞木 절에서 종이나 징을 치는 나무 막대)으로 쳐서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을 때 사용되었다.

옥천사향로 (玉泉寺香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를 말한다.
높이 23㎝, 입 지름 27.5㎝인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선시대 향로로, 입 주위에는 넓은 테를 가진 전이 있으며, 안쪽으로 ‘의령수도사’라고 점선으로 새긴 글자가 있다.
향로 몸체의 둘레에는 4곳에 꽃 모양으로 창을 만들고, 그 안에 봉황을, 남은 공간에는 빈틈없이 덩굴무늬를 새겨 넣었다. 아랫부분의 받침대에는 문양이 없고, 그 형태가 몸체와 균형이 맞지 않으며, 조선 순조 16년(1816)에 보수하였다는 글씨이 새겨 있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으로 입히는 방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만들었으며, 표충사 은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옥천사동종 (玉泉寺銅鐘.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     

조선시대 청동으로 만든 높이 110㎝, 입 지름 82.5㎝의 종이다.
종을 매는 용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앉아,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를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윗쪽 띠에는 2자씩으로 연결된 80여자의 범자가 새겨 있으며, 아래쪽 띠에는 연꽃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범자무늬 아래에는 4곳에 정사각형의 유곽이 배치되었는데, 유곽은 덩굴무늬를 그려 만들었다. 유곽 안에는 9개의 도드라진 유두가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아래쪽 띠 위편에는 ‘건륭 41년’으로 시작되는 글이 있어, 조선 숙종 27년(1701)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진주 민란 때에 파열된 것을 수리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고성옥천사소장품(固城玉泉寺所藏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고성 옥천사에 소장되고 있는 총 110점의 유물이다.(원래 119점이었으나 지장보살도와 시왕도 등 9폭이 2010.12.21 보물로 승격되었다.)
소장품 중에는 크기가 가로 81㎝, 세로 78㎝인 법고가 있는데, 이것은 독경을 하거나 염불을 외울 때, 리듬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삼존위목대는 가로 34.5㎝, 세로 54.5㎝ 크기로, 구름과 용·봉황을 조각하여 채색하였다. 가로 103㎝, 세로 152㎝ 의 규모를 하고 있는 시왕탱화는 불교의 시왕(十王)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든 불교그림으로, 벽에 걸 수 있게 되어 있다(2010.12.21 보물로 승격). 그 밖에 동제 향로와 집전 행사용 도구인 바라가 있고, 1981년에 제작된 신상탱화와 큰 나무로 만든 밥그릇이 있으며, 예불 행사용 불구인 굉소와 동제 밥그릇 등이 있다.
불교의 의식이나 행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물들이다. (출처:문화재청)




 


청담대종사 사리탑비

청담대종사 사리탑

담靑潭 : 1902년 10월 2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남규영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하였다. 1955년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하였고, 1956년에 조계종 종회의장을 거쳤으며, 1966년에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을 지냈다.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도선사에서 입적하였다.
광복 이후 왜색불교인 대처승 제도를 청산하기 위한 불교정화운동을 주창하여 그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다. 승단정화를 통한 불교의 정통성 회복과 불교 현대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곧 도제양성·역경·포교 등 3대 사업이었다. 이외에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 운동에 기여하여 군종법사제(軍宗法師制)를 실현하고, 『대한불교』(오늘의 『불교신문』)를 창간하였다
조계종으로 명명되는 정통 선종의 선맥을 이은 스님으로서, 현세를 중시하고 호국불교의 의의를 주창한 원력보살, 대승보살로서의 사상적 특징을 지닌다.
저서로는 『청담대종사전서』총 9권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집을 발간하였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1)을 수여받았다. 2001년 서울 도선사에 청담스님을 기리기 위해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청담장학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2년 진주산업대학교에 청담사상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이후 2005년까지 3권의 논문집을 발간하였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