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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인수南仁樹 동상

노촌魯村 2017. 3. 2. 13:39


남인수南仁樹(1918~1962) 동상

1918년 10월 18일에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 194번지에서 태어났다. 남인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난 남인수(당시 이름은 최창수(崔昌洙))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장하방 씨)가 강씨 문중으로 재가(再嫁)를 하게 되어 이름을 강문수(姜文秀)로 바꾸었다는 말도 있고, 어렸을 적에 너무 가난하여 강씨 문중에 양자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진주제2공립심상소학교(지금의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39년 4월 7일에 김은하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고, 1958년 말경 부인 김은하와 이혼하였다. 1962년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타계하였으며, 당시 44세였다.
남인수는 평소 노래실력이 뛰어나 여러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가수의 꿈을 키우던 중 1935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시에론 레코드사에서 「눈물의 해협」이라는 곡을 취입하여 레코드 가수로 데뷔하였다.

1936년 말에 오케 레코드사로 옮겨 예명을 남인수(南仁樹)로 하고 오케 레코드 전속 제1탄인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를 취입하여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케 레코드사에서 매년 히트곡을 내놓았는데, 1938년에는 「눈물의 해협」을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을 취입함으로써 명색이 대형가수로 자리매김 하였고,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그런데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 무렵 남인수도 어쩔 수 없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혈서지원」, 「그대와 나」 등의 군국가요를 부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3·8선이 갈라지자, 당시 고려 레코드에서 남인수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을 음반으로 발표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을 거쳐,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시대별 주요 히트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7년 「인생극장」·「물방아 사랑」, 1938년 「애수의 소야곡」·「꼬집힌 풋사랑」·「항구마다 괄세더라」, 1939년「감격시대」·「항구의 청춘시」·「안개 낀 상해」, 1940년 「울며 헤진 부산항」·「눈 오는 네온가」, 1941년「청춘항구」·「인생」·「포구의 인사」, 1942년 「낙화유수」·「남매」·「청년고향」, 1943년 「어머님 안심 하소서」·「남아일생」·「서귀포 칠십리」 등이다.
1962년 6월 26일에 폐병으로 작고한 남인수는 서울 조계사에서 당시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진 뒤 경상남도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묻혔는데, 장례식장에서 장송곡 대신에 남인수의 대표곡인 「애수의 소야곡」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1984년 12월에 남인수 노래 기념비가 진양호 내에 세워졌으며, 2001년 5월에는 남인수 기념사업회에서 남인수를 기리기 위해 노래 기념비 자리에 남인수 동상을 건립하였다. 2004년에는 남인수 팬클럽에 의해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위치한 남인수 묘소를 정화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망대에서 본 진양호(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